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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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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 로마서 – 예사랑 성경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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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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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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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로마서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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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5장 – 조정민, 조선은, 박한수, 박정수 목사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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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강해 설교말씀] 칭의(稱義)의 결과(롬 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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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稱義)의 결과(롬 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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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학 – 로마서5장주석. 롬5:1-11 의로운 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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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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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강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삶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었다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한다. 그리스도인의 현재는 미래가 침투한 것이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제안한다. ‘얻었다’는 디카이오덴테스(Δικαιωθέντες)를 부정 과거 시제로 사용함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의로움을 강조한다. 앞으로 의로운 것이다. 새 관점 주의자인 제임스 던은 이 부분을 다른 시제들을 압도하는 것을 봐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WBC 로마서 상) 의로움을 통해 ‘하나님과 화평’ 하게 된다. 화평은 구약의 샬롬을 번역한 것이다.
로마서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두 번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다. 서있다(ἑστήκαμεν)는 과거완료형으로 이미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음을 말한다.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뿐 아니라 보고 즐거워한다. 시편 1:2처럼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한다.
로마서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 ‘καυχώμεθα ἐν ταῖς θλίψεσιν’는 환난 안에 있지만으로 해석된다. 즐거워한다 ‘καυχάομαι’는 우리가 아는 즐거움보다 ‘자랑스럽다’ ‘영광스럽다’의 의미가 더 강하다. 롬 2:17, 2:23, 고전 1:29에서 사용되었다.
환난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참아야 하는 이유는 즐겁기(영광스럽기) 때문이다.
로마서 5:4 인내는 연단을 ,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내는 반복이며, 반복된 인내는 연단으로 이어진다. 인내는 다시 소망으로 확증된다.
인내 도키메 δοκιμήν는 입증된 질적인 면의 의미이며, 품성, 검증된 품성, 또는 검증이 끝난 의미이다.
‘앎이로다’는 경험으로 알게 된 지식을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서 봐서 안다. 우리는 결국 소망을 이룰 것이라는 수사적 기법이다.
로마서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소망-엘피스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러움은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말한다. 즉 심판을 받지 않게 한다.
‘부끄럽다’καταισχύνει 는 현재형으로 지금 이미 부끄럽지 않다이다. 왜냐하면(ὅτι)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실현된 종말론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왜 이미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한다. 근거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취했다. 그 안에 들어갔다.
ἔτι γὰρ Χριστὸς ὄντων ἡμῶν ἀσθενῶν ἔτι κατὰ καιρὸν ὑπὲρ ἀσεβῶν ἀπέθανεν.
어순이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순이다.
연약할 때는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함, 의를 이루지 못함을 포괄한다.
때에(κατὰ καιρὸν)는 적절한 시기, 알맞은 순간, 종말론적 순간 등을 말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순간을 말한다. 즉 크로노스가 아닌 카리로스다.
로마서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7절은 누군가를 위하여 죽지 않는다를 말한다. 순교는 개인이 아니라 종교와 나라와 명예를 위해서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개인을 위해 죽으셨다. 여기서 의인과 선인을 비교하가 분석하면 안 된다. 의인과 선인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비교되어야 한다. 누가 타인을 위해서 죽는가. 없다. 이런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위해 죽는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요한복음 15: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구절도 도치되었다. 아래의 순서와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συνίστησιν δὲ τὴν ἑαυτοῦ ἀγάπην εἰς ἡμᾶς ὁ Θεὸς ὅτι ἔτι ἁμαρτωλῶν ὄντων ἡμῶν Χριστὸς ὑπὲρ ἡμῶν ἀπέθανεν.
바울은 먼저 강조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어간다. 먼저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συνίστησιν 확증했다. 영어 Demonstrates로 번역. I place together, commend, prove, exhibit; instrans: I stand with; I am composed of, cohere. 등의 의미를 갖는다. 논증하여 증명하다는 의미가 강하다.
함께 서다(σύν+ἵστημι)는 뜻이다. 함께 서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 증명해 내다는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증거다’라고 외치고 계신다.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의롭다 함을 받았다. δικαιωθέντες는 부정 과거로, 이미 종결된 사건이다. 이전에 이미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미완료가 아니 과거완료형을 통해 법정적 선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 난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원수 되엇을 때 화목하게 되었다. / 그의 아들을 통해 / …
εἰ γὰρ ἐχθροὶ ὄντες κατηλλάγημεν τῷ Θεῷ διὰ τοῦ θανάτου τοῦ Υἱοῦ αὐτοῦ, πολλῷ μᾶλλον καταλλαγέντες σωθησόμεθα ἐν τῇ ζωῇ αὐτοῦ·
카탈랏소 καταλλάσσω 화목하다. 수동태형으로 화목하게 되었다.
로마서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 한다. καυχώμενοι 현재형으로 지금 즐거워 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아암.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사라지지 않는한 기쁨도 사라지지 않는다. 신자와 그리스도는 연합되어 있다.
아담과 그리스도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는 1-11절까지를 요약을 의미. 한 사람은 아담이다.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니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들어온 것이다. 원죄는 성경적 원리다. 개혁자들의 개발된 교리가 아니다. 한사람은 곧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 죄는 사망이다. 한 사람 죄는 모든 사람의 죄로,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죽는다.
로마서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죄와 율법의 관계. 율법은 모세로부터. 하지만 죄는 그 전에도 있었다. 창세기 4장에서 최초의 최가 발현된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 살인은 3장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일어난다.
여기다 알ㄹ로게오. 상업 용어로 ‘타인에게 부과하다’ ‘대신 지불하게 하다’ 등의 의미다. 즉 율법이 있기 전에 죄에 대해 무감각했음을 말한다. 그때도 죄가 지배했고, 죄의 삯인 사망이 일어나고 있었다.
로마서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의 죄다. 아담의 강력한 영향력을 말한다.
왕 노릇. 통치하다. 지배하다. 사망이 지배하다. 모두가 죽었다.
오실 자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도 모든 자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말하려 함.
로마서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은사 카리스, 선물 도레아(δωρεά).. 은사도 선물도 동일하게 카리스지만. 바울은 이곳에서 카리스와 도레사를 구분하여 사용함. 도레사(δωρε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는 예의를 차리는 선물을 말한다. 선물로 바울 신학을 다룬 책은 존 바클레이 <바울과 선물>(새물결플러스)이 있다.
요 4:10, 행 10:45, 롬 5:15, 고후 9:15, 엡 3:7, 4:7, 히 6:4 등에서 사용됨
같지 않다. 종류가 다르다. 아담이 죽음을 줬다면 예수님은 생명을 주신다.
Ἀλλ’ οὐχ ὡς τὸ παράπτωμα, οὕτως καὶ τὸ χάρισμα· εἰ γὰρ τῷ τοῦ ἑνὸς παραπτώματι οἱ πολλοὶ ἀπέθανον, πολλῷ μᾶλλον ἡ χάρις τοῦ Θεοῦ καὶ ἡ δωρεὰ ἐν χάριτι τῇ τοῦ ἑνὸς ἀνθρώπ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εἰς τοὺς πολλοὺς ἐπερίσσευσεν.
로마서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5절 그 은사- 같지 않다. 그 범죄
16절 이 선물- 같지 않다. 그 사람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름
많은 범죄로 의롭다하심을 받음.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아담 사망이 왕 노릇 하게 됨
예수 신자들이 왕 노릇 하게됨 (생명 안에서)
종에서 아들로의 전환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범죄 많은 사람 정죄
한 의로운 행위 많은 사람 의로다 함 받아 생명에 이름
로마서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는 불순종이다.
생명은 순종으로 얻어진다. 순종과 불순종은 계명에 대한 것이다.
로마서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이 옴으로 죄를 명확히 드러낸다.
‘들어온’ 과거 완료. 옛날이 이미 들어왔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 은혜가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더’는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의 깊이를 말한다.
넘치다 ὑπερεπερίσσευσεν는 최상급으로. 과거형이다. 이미 넘쳤다.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은혜(χάρις)도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른다.
왕노릇 하다(βασιλεύσῃ) 부정 과거. 옛날에 왕노릇했다. 죄의 왕노릇은 직설법, 은혜의 왕노릇은 가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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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로마서 제 5장
=====5:1
그러므로 – 이는 1장에서부터 4장, 특히 3:21부터 4:25까지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
요 그 적용이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함을 시사한다.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
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구속된 자에게도 그 칭의의 혜택
이 전가됨을 말하였다. 이제 5장에 들어가면서 ‘그러므로'( , 운)라고 말하는 것
은 이신 칭의에 대한 결론뿐만 아니라 그 적용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열매들을 언급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여기서 우리는 칭의의 결과에 대한 바
울의 진술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믿음’ 자체에 대한 성격 규정이 필요하다. ‘믿
음’에 대한 견해에 따라서 본서의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판가름나기 때
문이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선물이므로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
고 다만 율법과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Deissmann, Michaelis).
이는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취해
진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믿음이 순종과 동일시되며(히 3:18, 19), 본절에
서처럼 ‘믿음으로'( ,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디카이오덴테스)이라는 동사의 조건이 되는 구
절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3:22, 30;갈 2:16;3:14;빌 3:9). 이와 관련
하여 불트만(R. Bultmann)은 “공적에 대한 철저한 포기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구
원의 길에 공손하게 굴복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
로서 ‘믿음'( , 피스티스)은 옛 ‘자아’ 대신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는 순
종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역설하였다(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여기서 불트
만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즉 ‘아래서 위로’ 행
하는 행위임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에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보
수주의의 견해(Machen)를 부정하면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바울에게서 애매하게 사용
된 것을 수정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렇지만 ‘믿음’ 자체가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 ?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다면,
합리적인 인간은 무엇을 근거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 불트
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순종’이 ‘믿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심적(心的)
요소가 외부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
고 믿음은 심적 요소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은사(恩賜)가 아니고는 믿음을 지니는 것
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할 수 있게끔 인간의 심
성으로 하여금 ‘믿음’을 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는 인간은 ‘믿
음’을 갖을 수가 없다. 따라서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칭의의 조건으로 보일 때가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순종’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덴테스'(
)는 동사 ‘디카이오오'( , ‘의롭다 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본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과 당시 본 서신의 수신인인 로마 교회 성
도들이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임을 암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예수 그리
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주는 주체이시다.
여기서 바울이 ‘화평'( , 에이레네)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죄인된 인간
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1:18;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의 문제가
해결 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
간이 칭의를 얻게 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채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화
평’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평안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Shedd). 그러나 본절의 문맥을 고려할 때 그리고 기타 바울
서신에 나타난 ‘화평’이란 단어의 사용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주장은 지지를 얻지 못
한다. 즉 본절의 ‘화평’ 앞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
과 사랑하는 호의적 관계로 진전되었다는 맥락에서 화평이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골
1:20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사실이 강조되었고 엡 2:14
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화평이 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으므로, ‘화
평’이란 단어는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견
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화평’은 인간 내부의 인격적 변화를 말하기보다는 하나
님과 원수된 인간이 회복의 관계로 진전된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
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된다.
=====5:2
그로 말미암아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
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
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
어 있다(NEB, RV, RSV).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엡 2: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
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
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
)은 ‘접근'(access),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
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F. Bruce). 성도
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
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1:23 주석
을 참조하라.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
)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 )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
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rejoice, KJV, NIV, RSV)로 해석하는 학자
들이 많다(Hendriksen, Black).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
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Lenski).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
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
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는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
킨다’고 주장한다. (2) ‘카우코메다’가 1절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
멘'( 혹은 )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請誘形)으로 ‘즐거워하
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절과 본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
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절과도 조화가 잘 된다(3절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
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요
14:3;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2:10;벧전 5:4).
=====5: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
)은 동사 ‘들리보'( )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
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는 동사 ‘카우
카오마이'( )의 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
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
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
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
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
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
구된다(마 13:20-22).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 )는 동사
‘휘포메노'( )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에는 ‘최후까지 남
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
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W. Hendriksen).
=====5:4
인내는 연단을 –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 )는 ‘증명
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
키마조'( )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
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
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
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벧전 1:7). 혹자는 ‘도키메’를 ‘체험’으로 번역한다
(Calvin). 즉 그는 본절의 ‘도키메’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
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
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행 28:20).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
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고전 15:12-16). 이 말은 그
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
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 )는 ‘만들어내
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
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절의 ‘앎이
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 )는 ‘오이다'( )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는 ‘에이도'( )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
는 ‘기노스코'( )가 주로 육적(肉的)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
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
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 바울은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도 가운데 계시며 역사
하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인쳐 주
시는) 분이시기에 전신앙(全信仰)의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
게 하신다. 한편 ‘성령으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 프뉴마토스'(
)이다. 이처럼 헬라어 전치사 ‘디아'( ) 다음에 목적격인
‘프뉴마'( )가 오지 않고 소유격인 ‘프뉴마토스'( )가
온 것은 성령이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 내지 방법이 됨을 암시한다. 본
절 외에도 신약 성경 전체에서 ‘디아’ 다음에 ‘프뉴마’가 온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다만 ‘엔 토 프뉴마티'( )처럼 여격이 와서 방법을 나타
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함을 의
미한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장래의 구원까지
보장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요 수단이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 그 자체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
시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이다(요 14: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
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
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8:39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본절의 ‘부
은 바 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케퀴타이'( )는 3인칭 단수 완
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쏟아 부은 바 되었다’는 의미이다(has been poured, RSV). 여
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 부어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
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 사랑의 표현
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언
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
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
을 가리킨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논'( )의 의
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진다. ‘아스데논’은 ‘아스데네스'( )의 제 2격 복
수로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
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기약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 )은 ‘정해
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요 2;4;4:23). 하나님의 구
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53:2) 하나님
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
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
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
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
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는 그 외에도 ‘…대신
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
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
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
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
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
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
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
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
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
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
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
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
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 , 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
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
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
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
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
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그리고 ‘우
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 , 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
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 , ‘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
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
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
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요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
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
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
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
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
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
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
자게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
신'( )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
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
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
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
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
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
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5:9
본절은 6절과 8절 내용의 연속이나 좀더 자세하고 진일보한 면을 갖는다. 즉 6절에
서는 ‘우리가 연약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
셨고 8절에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셧다’고 하
였다. 이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 )은 주로 ‘그런즉’ 또는 ‘그러므로’라
고 개역 성경에 번역되었다(1절;4:9, 10, 16, 22). 본절에서는 앞절의 설명과 연결짓
기 위해 유도된 접속사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이유를 나
타내는 분사 구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은 앞에서 말한 바에서 한층 논리가 진전됨
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4:25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칭의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나 본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대속(代贖)에 대한 설명이
다. 즉 4:25은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가 칭의의 근원이라는
진술이며,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이 칭의의 근거라는 진술이다. 이러한 사
실은 ‘그 피를 인하여’라는 표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문구는 헬라어로 ‘엔 토 하
이마티 아우투'( )이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
면 ‘그의 피 안에서’이다. 여기서 바울이나 전치사 ‘디아'( )를 사용하지 않고
‘엔'( )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아’는 ‘….을 통하여'(throught)
라는 방법, 수단의 의미를 지니나 ‘엔’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상태, 조건’을 나타
내는 포괄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주 안에서'( , 엔퀴리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예수)등의 독특한 표현을 사용할 때 ‘디아’를 썼다. 본절에서 ‘디아’의
사용은,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대속적 능력이 있어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근원이 될 뿐
만 아니라 한번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을 계속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함축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
에도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와 능력의 작용을 받아 계속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
이다. 한편 본절의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1절의 ‘믿음으로 의롭
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표현과 비교가 된다. 두 구절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
라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1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있어 인간
편의 책임과 의무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었고 본절에서는 의인(義認)의 근거로서의 하나
님의 대속적 피흘림이 강조된 것이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
한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이 칭의를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의 ‘칭의’는 재판관에 의해 무죄 선고를 받아 벌을 면하게 되는 법정적인 차원의 ‘의’
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죄인된 인간과 진노하시는 하
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 뜨리는 ‘화목 제물'(propitiation)이 되셨다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한편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폴로 말론'(
)으로서 비교법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즉 본절에서 ‘폴로 말론’
은 단순히 ‘더욱’이란 의미가 아니라 ‘훨씬 더’, ‘더욱더’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말
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이 칭의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고 있다는 뜻이다.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 이 표현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6절), 또는 ‘우리가 죄
인 되었을 때'(8절)란 의미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형성되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을 이루
는 단어 ‘원수'( , 에크드로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하
나님을 향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
(Lightfoot)와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수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가
있다(Murray, Harrison). 두 가지 견해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일면 타당
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주장한다면 다른 일면을 소홀히 하는 자가
당착(自家 撞着)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원수’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성
의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놓쳐버리게 되며, 또한 ‘원
수’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하심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인간
의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의 견해를 모두 포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수하였을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이 온테스'(
)의 ‘온테스’가 능동이나 수동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 분사로서 다만
어떤 상태나 조건을 나타낼 따름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이 화목(和睦)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물론 ‘칭의’이다. ‘칭의’가 없이는 하나님
과 인간의 화목은 있을 수 없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머무
르는 자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
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신다. 바울이 이처럼 화목을 강조하는 것은
‘화목’ 자체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후 5:18
에서 언급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할 때에, 이 직
책이란 물론 죄악된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제사장적 직분(벧전 2:9)이지만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전하는 직책’이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
유는 (1)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2)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 조에)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
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보
다 부활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한편 본절의 ‘화목된’과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각각 ‘카탈라겐테스'( )와 ‘소데소
메다'( )이며 이 둘은 모두 1인칭 복수 수동태이다. 이는 하나님
과 죄인된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또한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칭의와 화목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다(3:25-28).
=====5:11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화목을 얻게 하신’이란 표
현은 지금까지 바울 자신이 설명했던 ‘칭의’, ‘진노하심에서의 구원’, 그리고 ‘구원’
을 포함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여기서의 ‘즐거워하다'(
, 카우코메노이)란 말은 2, 3절에서 언급된 동사인 ‘카우코메다'(
)의 분사형에 대한 해석이다. 본절에서도 이 동사는 ‘자랑하면서 즐거워하다’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exalt, MB). 그러면 본절에서 의미하는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인가 ?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
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이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
을 바라는 즐거움이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
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
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
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
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되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다.
=====5:12
이러므로 – 이는 헬라어 ‘디아 투토'( )의 번역으로 어떤 학자
는 이 접속사가 6-11절과 12-21절 내용을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다고 보지만
(Lenski), 본절에서 이 접속사의 사용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진
술과 본절부터 진술될 내용은 직접적으로 어떤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
리는 ‘디아 투토’를 별 의미 없이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된 단순 접속사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히브리식 문장 전개 방법임을 이미 2:1의 주석에서 설명한 바 있
다.
한 사람으로…들어오고 –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 새시대(new aeon)가 시작됨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창조의 시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오염되었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죄의 세력’이 세상
을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던
명령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죄와 사망은 불가피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사망’은 (1) 육체적인 죽음, (2)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엡 2:1;5:14;골 2:13;딤전
5:6;계 3:1), (3) 지옥의 형벌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계 21:8). 본절에서는 두번
째와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6:23은 마
지막 영생과 사망이 대조되어 있으므로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더욱 타당하다. 자세한
것은 6:2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 바울은 한 사람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죄가 보편성을 지님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죄의 보편성에 대해 증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이미 1:18-3:19에서 이미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르렀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엘덴'( )은 일반적으로 ‘통
과하다’, ‘퍼져가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몇몇 영역 성경은 문자적으로 ‘퍼져가다’
(spread to)로 번역하기도 한다(RSV, NASB). 그렇지만 또 어떤 영역 성경은 개역 성경
과 같이 ‘이르렀다'(came to)로 번역하기도 한다(NIV). 어떤 번역을 취하든지 본절의
의미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 본절은 삽입구로서 반론(反論)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 반론이란 ‘모세 율법이 있기 전까지 과연 죄가 존재
했던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비록 기록된 율법으
로 죄를 심판하지 않으셨으나 인류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저주 아래 있었다고 한다.
즉 율법이 공포되지 않았을 때의 범죄자들 또한 결코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죄의 결과로 생
기는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14절). 또한 이 같은 사실은 모세 율
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시대에 아우를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사실(창
4:9-15),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은 사실(창 6:1-7),
바벧탑 사건(창 11:1-9),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창 19:23-29)등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여러 실례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결론적으로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
세까지(14절) 기간에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죄
의 (1) 역사성(歷史性)과 (2) 보편성(普遍性)이 시사되어 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아니하느니라 – 모세 율법 전에도 각 나라마다 비록 원시적
이긴 하지만, 사회를 통치해 나가는 불문률(不文律)과 법률 및 도덕적 관습이 있었으
며 사람들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왔었다(Ur-Nammu Code, Eshnunna Code, Lipit-Ishta
Code, Hammurabi Code, Hittite Code). 그러므로 율법 이전에도 ‘죄에 대한 정죄’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본절과 같은 진술을 하였는가
? 바울은 단순히 법에 저촉되는 ‘죄’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
적인 의미에서의 죄, 곧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 그 자체를 죄로 규
정하고 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죄를 윤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던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러한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
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모세 율법이 공
포되었을 때 인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
=====5:14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 아담과 범죄는 (1) 하나님께 대한 불
순종이며, (2)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는 교만이었다. 그리고 모세 이전 사람들
이 이와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
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라는 표현
을 사용하여 인간의 범죄가 단순히 자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근본
적인 죄임을 선포하고 있다.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호 다나토스’
( )는 ‘사망이 왕권을 잡았다’로 번역된다
이 말은 세상이 죄악으로 충만했다는 의미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죄악의 세력이 꺾
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에 대조 되는 것으로 바울은 ‘은혜
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21절)라고 표현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렇게 아담을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신분이나 인류에게 미친 영향면에서 판이하
게 다르기 대문이다. 그러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1) 아담이 옛 시대의 시조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시조이다. (2) 아담의 범
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義)도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전
15:22;고후 5:14, 15). 즉 아담이 범죄의 시조라면 그리스도는 의의 시조이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 튀포스)이 될 수 있
다 (type, RSV)
=====5:15
그러나( , 알라) – 이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반대되는 뜻의 내용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앞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의 유사점을 말하였으나 본절에서
는 그리스도와 아담의 차이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은사 – 이는 언급된 사실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본절에 언급된 ‘은혜’와 관계
된다.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 ‘그 범죄’라 함은 ‘아담의 범죄’와 ‘아담의 범죄외의
다른 범죄’, 즉 ‘모든 범죄’를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은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교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아담의 범죄’라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서 ‘범죄'( , 파랖토마)가 단수형
이라는 사실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 ,
카리스마)와 아담에서 비롯된 ‘인간의 보편적인 범죄’를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은
혜’를 부각시키는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죽었은즉 – 12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와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했으나, 본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용어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표 단수를 사용하든지 단순히 복수를 사용하든지 헬라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
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도 이와
같다.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해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바울이 앞에서 ‘모든’이라는 총칭 형용사를 사용한 것과 비교
할 때 전혀 근거가 없다.
더욱 – 이 단어는 9절에서와 같이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비교급 강조의 의미를 갖
는다(much more, KJV).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처하게 되었으나 그리스도
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권세는 무너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Lenski).
하나님의 은혜 –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은 선물’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만 모든 사
람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 앞에서 이미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언급했으
나 지금은 ‘한 사람의 은혜’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범죄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
작되었듯이 은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써 상반절의 ‘이 은
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여기서 ‘많은 사람’은 앞에 언급된 ‘많은 사
람’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넘쳤으리라’는 동사는 14절의 ‘왕노릇하였나니’라는 동
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넘쳤으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페릿슈센'(
)은 ‘물이 그릇에서 넘쳤다’, ‘강물이 둑에서 넘쳤다’는 뜻으로 그
리스도의 은혜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넘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
별없이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문맥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동사 ‘에페리스슈센’은 목
적어로서 ‘에이스 투스 폴루스'( , ‘많은 사람에
게’), 즉 4격을 취한다. 헬라어에 있어 4격은 3격과 같이 단순 목적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을 꿰둠고’, ‘…을 관통하여’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
가 개인의 전인격을 철저히 변화시키며 죄악을 씻고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5:16
본절에서 바울은 범죄와 은혜의 기원(起原)과 그 위력(威力)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즉 범죄는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은혜는 사망이 왕노릇하는 데서, 또는
범죄가 만연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은혜’의 기원과 위력이 ‘범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선물( , 도레마) – 이는 15절에서 언급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을 가리킨다. 15절에서 ‘은사'( , 카리스마)가
‘범죄'( , 파랖토마)와 비교되었고 본절에서는 ‘은사’가 ‘심판’
( , 크리마)과 비교되었다. 은사는 값없이 주는 용서이며 심판은 엄격한 공
의로서 모두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
하셨고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본절은 바로 이 칭의의 선물이 심판의 효능보다
우월함을 선언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 ‘의롭다 하심'( , 디카이오마), 곧 칭
의(稱義)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
로 죄인들을 사면해 주시고 의로운 자들이라 칭하신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
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사이다. 또한 18절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
라’를 보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와 사망의 세력 아래 놓인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
을 받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회복되어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17
사망이…왕노릇하였은즉 – 본절은 12, 14절의 말씀을 요약 반복하고 있다. 즉 아
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선하게 창조된 세상에 들어와 온 세상을 오염시켰고 그 가
운데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래 하나님을 최고의 통치자로 삼고, 그의
대리자로 인간, 그리고 인간의 지배를 받는 만물 순의 질서 체계가 죄의 지배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대신에 죄(사단)가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어 하나님의 존재가 완
전히 무시되어 버림과 동시에 인간도 아무 주체 의식 없이 죄의 종노릇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질서 내지 통치권의 변화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마 4:8, 9). 마귀는 천하 만국을 자기의 것인양 자랑하면서 예수로 하
여금 자기에게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경배하라’는 사단의 요구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예배행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단에
게 세상의 지배권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셨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마 28:18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가르쳤다. 만일 그러한 권세가 없다면 예수는 세상의 구주 또는 주인
(Lord)이 될 수 없다. 다만 사단은 자신이 그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인 양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단이 죄로 세상을 오염시켰다는 의미에서는 그 역시 세
상의 지배자로서 자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 본장에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 자세한 것은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 여기서 ‘은혜’와 ‘의의 선물’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의미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으로서 저자가 주장하려는 논지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는 구실을 한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왕노릇하리로다 – 상반절과 비교할 때 대조와 구분이 완
전해지려면 본 구절은 ‘생명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리로다’라고
구성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왕노릇하다’의 주어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의도적인 변형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
다. 바울은 분명히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後嗣)’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성도
가 ‘하나님의 후사’라는 것은 단순히 ‘유업을 잇는 자'(갈 3:29)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영광된 신분을 강조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계 22:5
에서는 성도가 영원 무궁토록 ‘왕 노릇할’것이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성도의 신분을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했다. 그리고 ‘왕노릇’이란 말은
‘죄의 종’되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21절).
=====5:18
바울은 다시 12절부터 지금까지 진술했던 것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Murray). 그
러면서 그는 죄인된 인간이 생명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즉 (1) 한사람(아담)
의 범죄로 -> (2)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며 -> (3)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 (4)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 (5) 생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과정에 바울이 그동안 진술했던 ‘믿음’과 ‘화목’을 삽입해 보면, ‘믿음’은 (3)과 (4)
사이에 그리고 ‘화목’은 (4)와 (5) 사이에 삽입될 수 있다.
그런즉( , 아라 운) – 12절에서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
론이 시작됨을 나타낸다. 죄와 율법에 관한 13, 14절 내용과 구원의 은혜와 범죄에 대
한 심판을 대조시킨 15-17절 내용으로 중단되었던 아담과 그리스도 간의 비교가 12절
에 이어 다시 본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12절에 천명된 결론이 본절
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한 범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헤노스 파랖토마토스'(
)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한 범죄’
로 해석하거나 영역 성경이나(the offence of one, KJV;one man’s trespass, RSV) 독
일어 성경처럼(eines Sunde, Luther Bible) ‘한 사람의 범죄’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
다. 어느 경우를 취하든지 전후 문맥상의 의미에 있어서 별다른 차이를 초래하지 않으
나 후자의 해석이 지배적이다. 헬라어사본들 중의 가장 유력한 사본들 중 하나인 알렙
사본( )을 위시하여 고대 라틴어 사본들은 본문의 ‘헤노스’ 다음에 ‘안드로포스’
( , ‘사람’)을 첨가하고 있으며 많은 역본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
리고 15-17절에 ‘한 사람’이란 표현이 일관되게 반복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도
‘한 사람’이 원문에 충실한 듯하다. 아무튼 본 문구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가리
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조에 이른 것같이 – ‘많은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스 안드로
푸스'( )는 ‘모든 사람'(all men, KJV, RSV)을 의미
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세상에 사망의 권세를 가져왔고 전인류는 이 사망의 권
세에 눌려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은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
아’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행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많은 학자
들은 여기서 ‘의로운 행동’ 즉 ‘디카이오마토스'( )를 ‘칭의의
행동’으로 해석한다(Meyer, Gedet). 그러나 ‘디카이오마토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다고 여기시는 행위’, 곧 ‘하나님의 칭의 행위’란 뜻을 지닌 ‘디카이오시스’
( )와 구별되므로 ‘의로운 행동'(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RSV)으로 해석됨이 무방하다(Murray, Holsten 등).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모
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사역들을 총칭한다. 물론 이 구원사역은
십자가 사건에서 최절정을 이룬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는 근거는 바
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이 헬라어 본문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디카이오신 조에스'(
)를 번역하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칭의가 이르렀다’이
다(KJV, Modern Language Bible). 헬라어 본문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
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생명의 칭의'(justification of life)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생명’에 이른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다’함은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을 뜻함이 아니다. 성경은 분
명히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섬기는 자들에게 구원이 임함을 밝히고 있다(요
3:16;14:6).
=====5:19
본절은 앞절 내용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앞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범죄와 의
를 대조시켰으나 본절에서는 그 범죄와 의의 본질적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
께 대한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의 자발적인 불순종에 그 뿌리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
는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 아담의 범죄, 곧 원죄(原罪)를 말한다. 아담이 범
죄한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이 거스린 것은(창 3:1-6) 순간적이요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마음 먹었던 교만한 행위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였다.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 12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포했으나
15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진술했으며, 18절에서는
다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한편 ‘죄인된 것같이’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타데산'( )은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제정되었다’, ‘설립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KJV와 RSV가 번역한 것처럼 단순히 ‘만
들어진 바 되었다'(were made)는 의미가 아니라 ‘법적 판결을 받았다'(were
constituted)는 의미이다(NIV).
한 사람의…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
은 죄인된 것을 불순종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연관짓고 있다. ‘순종’이라는 용어에는
인간의 책임 문제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히 3:18, 19;4:2, 6). 무엇보다 ‘순종’이라
는 단어는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사 53:12;요 6:38, 39;10:17,
18;17:4, 5;빌 2:7, 8;히 5:8, 9),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에 대한 대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Murray). 그리고 성도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히 5:8, 9),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
리스도가 성취하신 결과를 아무 대가 없이 은혜로 주시기 때문이다. 한편 ‘의인이 되
리라’에서 ‘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스타데손타이'(
)는 미래 수동형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제정(制定)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미래 시제임을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성도들이 받을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한다(Meyer). 그러나 이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및 장래를 포함하는 모든 시대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본다(Murray, Sanday).
=====5:20
헬라어 성경 본문에는 본절 초두에 ‘데'( )가 언급되고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
은 이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KJV는 이를 ‘더욱이'(Moreover)로, Modern Language
Bible은 ‘그러나'(But)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데’는 본절에서 새로운 개념, 곧
‘율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유도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 본 구절은 인간에게 모세 율법이 부여되었음을 말하나 이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최초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그 이전에 법이 선
재(先在)함을 나타낸다. 이는 ‘가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이셀덴'(
)이 단지 ‘들어왔다’라기 보다는 ‘곁에 들어오다'(came in beside,
Green), ‘미끄러져 들어오다'(slipped in, Modern Language Bible)를 뜻하기 때문이
다. 실제로 모세이전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과 같은 족장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님
의 명령에 따라서 믿음의 길을 걸었고 모세 시대에는 성문화된 율법이 부여된 것이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은 율법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
금 더욱 죄를 짓도록 동기를 유발시켰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
께서 죄를 증가시켰다는 말이 된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요구에 비추어 보아(마 22:37-40;막 12:29-31;눅 10:27) 인
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에 예민해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었음을 의미한
다. 율법은 모든 죄의 가증함과 그 결과가 드러나도록 한다”(3:20;7:7, 13;갈 3:19).
또한 혹자는 “범죄를 더하게 하는 것은 율법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차적인 목적
이다”라고 설명한다(Black). 이러한 주장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바울의 의
도는 무엇보다 율법이 옴으로써 그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확실히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13절)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혹자는 딤전 1:9-11을 본절
과 연관지어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Herrison). 그러나
분명히 성도들이 인식해야 할 사실은 율법 자체가 죄를 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딤전 1:9-11에서는 이러한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딤전 1:9-11은 율법의 정죄 기능, 즉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율법을 통해서 정죄받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이 말은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범죄의 사실
이 더욱더 드러나 인간이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될수록 인간을 향해 쏟
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곳에서는 죄사함도 없으므로 용서에 대한 은혜를 깨닫는 일도
없다. 다만 죄가 죄로서 정죄되는 곳에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죄가 더한 곳에’의 ‘더한’에 해당하는 헬
라어 ‘에플레오나센'( )이 ‘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반면 ‘은
혜가 더욱 넘쳤나니’의 ‘더욱 넘쳤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레페릿슈센'(
)이 최상급의 최상급, 즉 강조 최상급으로 ‘넘침보다도 더욱
넘쳤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Murray). 다시 말해 은혜의 세력은 죄
의 세력을 휠씬 능가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상처입고 병
들어 죽어가는 자를 완전히 소생케 한다.
=====5:21
본절에는 바울이 그동안 논의해 왔던 중요한 개념들이(죄, 사망, 왕노릇, 은혜,
의, 예수 그리스도, 영생) 종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너무도
아름다운 끝 맺음’이라고 극찬하였고(Hendriksen) 송영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
기도 했다(Denney).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 ‘사망 안에서’란 표현은 ‘생명 안에서'(17절
하반절)란 표현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서 죄가 역사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죄의 결과
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12, 14절; 6:23). 따라서 죄는 ‘사망 선고를 받은 자들’
곧 ‘사망의 세력 아래에 있는 자들’에 한해서 왕노릇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의(稱義)
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죄가 왕 노릇할 수 없다(Lloyd Jones). 바울은 6장에
서 이것을 ‘죄의 종’과 ‘의의 종’의 개념으로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 앞 구절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본 구절의 ‘왕노릇하여’ 앞에 ‘생명 안에서’라는 말을 삽입시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은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사망 안에서 종 노릇하는
사람’과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17절)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구분은 예수의말씀 중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
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는 선
포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로마서 5장 강해
로마서 5장 강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화평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뜻은 ‘의롭게 간주되다’ 혹은 ‘의롭게 여겨지다’입니다. 결코 우리 스스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의롭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거룩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 편에서 의롭게 여겨주신 것이요 의롭다고 간주해 주신 것입니다. 주의 목적에서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고 그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죄의 용서함을 받았으므로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1. 이것은 복종으로 인한 화평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피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
죄인은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범죄는 권위에 대한 보공을 거부한 데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고 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불복종함으로써 인간에게 범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죽음과 온갖 고통이 왔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그 아들 그리스도에게 입 맞추기를 거절하고 복종하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에 분열과 분쟁과 다툼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를 누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모든 권위자들에게도 순복해야 합니다. 이 권위에 대한 순복이 거부될 때 평화는 깨어지고 갈등이 첨예화되는 것입니다. 참된 권위에 대한 복종이 없는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2. 이것은 화해로 인한 화평입니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돌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5)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실낙원하여 멸망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때로는 그 낙원을 찾아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인인 인간이 가까이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엡2:14,15)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난미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이 그 전에는 하나님께 대한 원수로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주로 모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전에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과 육체에 참 화평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마음, 원수된 마음은 사람에게 엄청난 갈등과 내적 고통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중재로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인간은 참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3. 이것은 확신으로 인한 화평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일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우리의 화평은 휴전상태와 같은 일시적이고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화평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다시는 그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은총을 누리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에 살기 때문에 결코 불확실성의 사회에 사는 불신자들과는 그 상태가 전연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치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우리의 마음에 충분한 영적 활기를 불어넣고 용기를 북돋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실현될 시기가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행복을 더욱 소중히 간직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사랑 (롬 5:2)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를 얻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그로 인해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가장 적절하고 충분한 은혜, 곧 불경건하고 서로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자들을 향해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은혜에 참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벧전5:12) 이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참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부터 존재하였습니다.
참사랑은 인간에 의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속에 내제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인간의 공동체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참사랑은 처음부터 인간과는 상관없이 존재하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서로 사랑하라'(눅10:27)는 계명을 주심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던지신 사랑의 실천으로 비로소 참사랑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이 참사랑은 그리스도의 사역 이전에도 존재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보내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참 사랑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참사랑이 독생자 예수까지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요3:16)
2. 참사랑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이르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참사랑이 그리스도의 오심 이전에도 존재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까지는 아직 참 사랑이 우리에게 이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오시기 이전까지 율법의 정죄 아래 있던 인류에게 참사랑의 마땅한 열매인 죄의 사유와 구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에게 사유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이 성취되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런 공로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주심과 참된 사랑의 실천으로 사랑을 우리에게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며, 우리를 참사랑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창조주 하나님의 참사랑을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참 사랑 안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값없이 주시는 은혜요 참사랑입니다.
3. 참사랑은 영속적인 삶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와 함께 시작된 참 사랑의 역사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참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값없이 주시는 참사랑은 영속적인 화평과 보호로 나타납니다. 또 이 참 사랑 안에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값없이 주신 참 사랑의 창고에서 신앙없는 죄인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울만한 가치있는 것들을 찾지 못합니다. 아니 이런 값없이 주신 사랑의 창고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릅니다.그러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참사랑을 소유하고 또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는 이 사랑의 창고에서 어떠한 삶의 원천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의실천입니다. 곧 값없이 받은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눔으로 그 가치를 배가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 사랑은 영속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풍성한 사랑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4. 참사랑은 기쁨과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풍성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으면 그 곳에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우리에게 견고하게 보장된 기쁨으로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 그 사랑이 우리를 위해 행할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에서도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또한 기뻐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참사랑을 확신하고 로마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기쁨과 평강이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롬15:13)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 안에서 화평을 누리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기 때문이며(엡2:14), 우리가 참 사랑의 은혜 가운데 언제나 삶의 보장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참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전능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딤전1:1)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을 깨우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참사랑 그 자체입니다.
고난과 영광 (롬 5:3)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완전한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절대적인 행복을 얻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과 불행의 혼돈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 구속받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함은 세상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의 고난은 소망이 없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통해 다가오는 찬란한 미래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우리가 환난중에서도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절) 그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의 의미는 무엇이며 고난의 결과는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도의 환난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이 이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모든 환란을 종식시키고 오직 행복만을 줄 것이라고 곧잘 오해합니다. 특히 전통적인 무교와 불교의 기복신앙에 영향을 받아 온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인간의 육체적 질병이나 사회적 억압, 물질적 가난과 같은 고난에서 자신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하면서 헌금의 목적과 기도의 내용들이 이러한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세상의 고난에서의 구원이 아님을 증거합니다. 바울은 회심후에 자신의 육체적 질병을 위해 세번이나 기도했음에도 하나님은 바울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으며(고후12:7-9) 복음 전파중에는 유대인들에게 사심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았고, 베드로는 로마에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이와같이 구속받은 성도에게도 세상의 고난은 언제나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적인 축복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믿음이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이 변치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롬8:35)에서도 믿음이 변치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풀무불에서 자신들을 구하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노라고(단3:18)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되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헌신을 깊게 하여 자신의 믿음을 단련하므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히11:38)정금같은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2. 환난의 보상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환란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큰 축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환난의 보상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현세의 축복
영원한 소망이 없는 인간은 고난당할 때 좌절하고 세상에 대한 믿음과 바른 가치관을 포기하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창조적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에 결코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다가 겪은 환난은 우리를 정금보다 귀한 믿음을 갖게 하여 하나님의 보다 적극적이고 깊은 사랑을 얻게 합니다. 또한 세상의 죄와 연합하여 행복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오히려 끝없는 갈등과 번민 속에서 절망을 맞이하나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육신은 괴로우나 그 마음은 예수께서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요14:27)
2) 내세의 축복
그러나 정금보다 귀한 믿음과 영혼의 평안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시작이며 그림자일 뿐,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내세에 받을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롬8:18) 것입니다. 첫째로, 고난을 받는 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집니다.(고후1:6-11) 주님은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는 그릿도와 더불어 영생에 참여할 것입니다. 둘째로 영광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달려감은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기 때문이라고(딤후4:8)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버리고 선한 싸움을 위해 고난받은 성도들을 위해 영광의 면류관을 준비하셨다가 그날에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세째로, 모든 즐거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악의 세력과의 싸움으로 고통받고 고난을 당하였으나 고난 중에서 믿음을 지킨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위해 준비하신 모든 즐거움에 동참하게 되며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서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21:4) 영원한 즐거움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환난에 대한 성도의 자세 (롬 5:4)
바울은 5장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3-5절은 이 즐거움의 크기를 보충 형식을 빌어 강조 설명하는 내용인데 그 내용에 따르면 어떤 환난도 이 즐거움을 앗아가지 못합니다. 칭의의 즐거움은 환란까지도 능히 극복케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칭의의 즐거움이 환난과 역경에 의해 사그러드는 자가 있다면 그는 참된 신앙인이 아닌 것입니다.
1. 환난에 담대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행14:22) 그것은 환난의 감정이나 신비한 체험에서 비롯된 뿌리없는 믿음과 참된 믿음을 구분해 주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따라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환난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환난에 견디지 못할 감정적 신앙을 경고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보면 돌밭에 뿌리운 씨앗은 빠르게 싹이 나지만 뿌리가 없기 때문에 끝까지 견디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정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신실한 신앙을 가진 듯 하다가도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집니다. (마13:21) 환난은 역경과 압박과 곤경을 의미합니다.(신4:30) 그것은 어느 형태로든 모든 사람의 삶 가운데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에게도 환난이 필연적임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의 환난에 담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는 우리는 환난을 당해서도 담대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의 위협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응답하셨고 엘리야는 승리했습니다.(왕상18:20-40) 우리는 환난을 당하지만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담대해야 합니다.
2. 환난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고통을 견디어내는 자가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환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이며 모습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도리어 즐거워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마5:10-12)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마5:10)고 하셨습니다. 또한 환난과 핍박에 대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5:12)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을 즐거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5:41) 우리가 받는 환난은 잠시 뿐입니다. 그 환난은 극히 경한 것으로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해주는 귀중한 수단입니다. (고후4:17) 우리가 환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 인내해야 합니다.
환난은 거짓 믿음의 소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더 멀리하여 떠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믿음의 소유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것을 용납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환난과 고통을 참고 인내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들은 환난을 당하여 온갖 고통을 감수하며 참고 인내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모진 환난이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테스트 하시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옳다 인정하심을 받을 때까지 인내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의 믿음의 능력은 적지 않은 경우에 인내로 나타납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3-8)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환난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시험합니다. 형통할 때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에 ㅔ대한 사랑은 환난을 통하여 더욱 빛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될 때 환난에서 인내를 이루게 되며 성도가 환난에서 인내하게 될 때,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당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담대함과 인내함과 즐거워함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롬 5:5)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일차적인 목적은 이신칭의의 결과에 의한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입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① 하나님과의 평화 ② 은혜 안에 거함 ③ 영광의 소망으로 구분하였습니다. 특히 바울은 본문에서 세번째 내용인 성령에 의해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확신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성도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1.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성령
바울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롬8:9) 다시 말하면 성령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성령께서 참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재하고 계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겔36:27) 우리는 성령을 단순한 하나님의 감화 정도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바 되었으며, 주님께서도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14:17)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성도의 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의 전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고전6:19,20) 성도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장막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그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61:1) 이러한 성령의 내주는 영원한 구원의 보증인 동시에 새로운 삶의 전개를 의미합니다. (히10:15)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사역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코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율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엡2:5,8)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2. 성도를 감화하는 성령
성령은 성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믿음과 복종 배후에 계십니다. (히9:14) 성령은 거룩한 열심을 창조하시며 성도의 마음을 인도하시고 지시하십니다. (살후2:13) 또한 참된 경건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제시하고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성도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계시며 영원한 구원의 보장이 되어 주시는 동시에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심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롬8:26) 이상과 같이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동시에 성도 안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3. 성도의 성장을 이끄시는 성령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라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성령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주셔서, 그 마음을 조명하시고 성도의 어두운 마음 눈을 밝히시는 동시에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십니다. (고전2:10-16) 성령은 성도에게 참과 거짓을 구분하게 하시며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보증을 하심으로 성도의 성장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오직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고 그로 인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4. 성도를 깨끗게 하는 성령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화시켜 죄를 제거하는 것은 성령의 또 하나의 독특한 사역입니다. (요3:3,5) 이렇게 성도를 깨끗케 하는 성령은 성도가 하나님 심판대에 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서게 될 것을 보증하는 표가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한 것은 그 안에서 역사하시고 그를 성결케 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는 도저히 고백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고전12:3)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난미의 영을 받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부끄럽게 보입니다. 반면에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성령에 의해 영원히 거룩하게 성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삶입니다. ((갈5:22-23).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한 사랑 (롬 5:6)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손수 슭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 존재를 탄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최상의 것으로 이루어진 피조 세계를 삶의 터전으로 주셨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더럽혀지기 이전 처음의 세상 에덴동산은 실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는 낙원에서의 복된 삶에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로 반역의 길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는 죽음의 절망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죽음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사함받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끊임없는 범죄의 가능성 속에 살고 있는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세상에 오시고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증거합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경건치 못한 자들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1) 경건치 못한 인간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경건치 못한 자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합니다. 경건함은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징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경건은 행위를 삼가고 조심한다는 사전적인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배와 신앙고백의 태돌ㄹ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유세비우스는 경건에 대해 정의하기를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쳐다보면서 그분과 함께 보조를 맞추며 생활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범죄 행위는 스스로 하나님의 곁을 떠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력으로 악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삶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정욕을 따라 세상의 순간적인 즐거움을 좇고 또 다른 범죄를 양산하는 것이 죄인들의 연약한 속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없이는 경건한 삶을 불가능합니다. (벧후1:3) 강한 권능의 손으로 건져주지 않는다면 인간은 연약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멸망에 이르는 불경건의 죄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님은 처음부터 경건치 못한 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형식적인 경건의 모양 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죄인들의 무리 속에 오셨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패역하고 떠났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경건치 못한 자들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깊고 넓으신 사랑의 실체입니다. 그리스도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삶 속에서 완전한 경건을 실행하셨습니다. 단 한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만을 향해 사신 그리스도의 생애는 인간들을 깨우치는 신앙의 본보기입니다. 인간의 완악함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패역을 저질렀지만 주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전한 사랑으로 죄를 씻기시고 구속의 언약을 이뤄주셨습니다.
2. 구원받은 자의 삶
1) 신실한 신앙고백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얻은 인생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는 죄의 어둠에 갇힌 자가 아니라 생명의 빛에 속한 자로 새 삶의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의 삶에는 죄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한 감사와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진실한 신앙고백은 온전한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경건한 삶의 토대입니다.
2) 경건한 생활을 위한 노력
경건함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을 구분짓는 근거가 됩니다. 성경은 이방인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구원을 확증한 고넬료의 경건생활에 대해 증거합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행10:2) 이러한 고넬료의 생활은 경건해야 하는 신앙인들의 삶에 귀감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경건한 자로 인정받게 하십니다.
모든 인간들이 연약하여 죄의 사슬에 매여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고 경건치 못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그 피로 죄씻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하여 경건한 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참 죽음 (롬 5:7)
죽음은 삶의 결론이며 완성입니다. 죽음은 한 사람의 전체적인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악한 일과 죄를 짓다가 죽으면 악인으로 규정되고, 의나 선을 위해 살다가 죽으면 그는 의인, 혹은 선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죽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그것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본받는 죽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적극적인 삶입니다. 뜻 없이 무릎 꿇고 피동적으로 움직임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발 벗고 나설 때에만 가능한 삶입니다. 이같은 삶을 위해서는 우선 과감하게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인간은 불행히도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죄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배운 장로의 유전이나 율법을 아는 지식, 즉 자기의 생각이나 이념을 버릴 수 없었기에 끊임없이 예수께 도전했고 결국은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붙드는 대신 예수를 버렸습니다. 육적인 자아를 살리는 대신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집과 완악함에 사로잡힌 자는 자기를 위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권면을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될 수 있으면 그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철저히 부인함으로, 즉 그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버리고 인간의 죄 된 모습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 결과 인류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2. 의인을 위한 삶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선한 자를 좇으며 그를 위해 한평생을 살려고 합니다. 또 권세 있는 자나 능력있는 자를 사모하며 그들의 삶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잃어버린 자를 위하여, 죄인을 위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하여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이 미워했던 창기를 영접했고 세리와 더불어 먹고 즐겼으며 이방인과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문둥병자를 가까이하여 그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건강한 자나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든 자와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음을 세상에 널리 선포하셨습니다. 그의 죽음도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증거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즉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릴 속죄 양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죽음을 원하는 자, 즉 그리스도를 본받기 원하는 자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처럼 죄인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죄인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탄의 권세 아래서 방탕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생명이 없는 것들을 열심히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의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3.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대적자들에게 뺨을 맡기셨고 수욕과 침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딘 고통과 수욕을 피하려고 당신의 얼굴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사50: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당할 고난을 담대히 맞아들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히고 세상의 관원들과 이방인에게 넘겨져 조롱과 핍박과 능욕당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눅9:22) 예수살렘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같은 고난의 결과는 믿는 자에게 위로를 넘치게 하셨으며(고후1:5)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벧전3:18)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자기를 끝까지 순종하시고 죄인들을 위해 일하셨으며 고난을 끝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바탕이 되어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죽음은 죄인의 생명을 구원하는 죽음이었고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보좌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 죽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참 죽음을 원하는 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 즉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하며 이로 인해 오는 모든 세상의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세상에는 복음의 빛이 널리 퍼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이며 좀 더 소망있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발현 (롬 5:8)
6절에서 본문8절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발현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약화될 것을 염려한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그의 논증의 초점을 맞춥니다. 본문에서의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발현의 극치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현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구속을 창세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우선 6절의 ‘기약대로’라는 말씀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정해진 때’ 혹은 ‘약속된 때’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예비되고 계획된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의 차이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굳은 사랑의 맹세를 해도 상황과 여건에 따라 쉽게 변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같은 이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굳게 맹세한지 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세번이나 저주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마26:33)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당신을 거역하고 죄를 범했지만 여전히 사랑이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계획을 밝히셨습니다. (창3:15)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죄를 범했지만 인간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끝없는 배반의 역사를 뚫고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으며 그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2. 연약할 때 구속하셨습니다.
6절의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연약한 자로 판명난 때라는 말입니다. 즉 긴긴 역사를 통해 인간이 자력으로는 의를 행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났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율법도 주시고 수많은 예언자를 보내셨지만 유대인을 비롯한 온 인류의 종교적, 도덕적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세상은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고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롬3:10) 임박한 심판의 때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인류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며 복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든 입을 다물게 하셨습니다.
3.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본문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씀이나 10절의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는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는 단순히 인간에게만 짓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든지 하나님의 면전에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죄를 짓든 도덕적 죄를 짓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원수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것이 안타까워 자지 아들을 내어주시면서까지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본 모습입니다.
4.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방법, 또는 사랑의 발현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원한 사랑의 계획과 인내를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원수는 미워하고 아들은 사랑하며, 원수를 희생해서 아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정반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는 원수된 인간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책을 예수께 지워(사53:6) 당신의 진노를 받는 십자가 위에 들리셨습니다. (갈3:13) 그리고 그 위에 모든 인류에게 내리셔야 할 진노를 다 쏟으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에 달한 발현입니다. 당신의 아픔과 상처를 안으로 감수하시며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무너진 율법 (롬 5:9)
흔히 구약을 율법시대라 부르고 신약을 복음시대라 합니다. 그러한 시대의 분수령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의 분수령이 되셨고 율법의 시대를 폐하시고 전혀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일찌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지켜야 하며 이것을 지킴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통하여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연약한고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완전해지고 싶은 인간이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복음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율법에 불완전한 인간
하나님께서는 자연계를 통한 일반계시를 주셨으나 인간이 범죄 함으로 이 계시를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성문화된 율법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문화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알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온전히 지켜야만 의롭게 되는 칭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간혹 한두 가지의 율법을 지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온전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 앞에서 연약한 존재입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은 있을지라도 그 원함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때문에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생명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나 생명 길을 걷게 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율법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으며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2.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로 자기를 드리시고 희생 피를 뿌리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바 나의 피'(마26:28)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셨습니다.(히9:12)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선포한 법을 자신이 지키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범죄한 인간을 위하여 대속적 생명의 희생이 요구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이 요구에 순종하시고 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전생애는 의로운 생애였으며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생애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이 열렸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3.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
인간의 노력으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 할 수 있습니다. 공의란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죄는 하나님의 정의에 역행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 죄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며, 마땅히 벌할 것을 벌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즉 죄를 묵인하는 것은 무법과 불법입니다. 곧 하나님의 정의는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성취해야 만족하는 성질의 것입니다. 범죄하는 영혼은 반드시 죽습니다.(겔18:4)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죄인을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고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을 성취한 그를 믿는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자들입니다. 그의 의를 힘입어 의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구속의 확신 (롬 5:10)
본문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는 말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인이었을 때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죄인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죄인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6절의 ‘연약할 때’란 우리의 마음에 죄성이 남아 있어 언제나 범죄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 없었다면 그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인으로 그대로 남아 있어 하나님의 원수에서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가는 인간에 대해 깊은 원한을 느끼는 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에 대한 이러한 깊은 원한에도 나타나나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생겨난 원한은 그 죄의 대가를 치루기 전에는 풀릴 수 없고 화목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죄인의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신인간에 화목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골1:21,22) 인간은 스스로의 죄악된 행실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진정한 아버지시요 만물의 생명과 식물을 주시는 창조주를 배반하였습니다. 그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자행자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줄로 생각하고 때로는 자고하여 하나님께 도전하는 말을 함부로 하고, 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금수와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기도 하였으며, 나무와 돌로 조각한 신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3)고 선언하셨으나 처음부터 우상숭배에 빠져 악을 행해온 인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상을 만들고 음란하듯 그것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계셨는데, 인간은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지 않고 끝까지 등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장이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의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스스로 자원하여 들어갔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절) 진실한 사랑은 반드시 외적인 행위로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내면의 심리상태에서 우러나는 것이지만 그 표현은 행동으로 표출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가장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여러 모양인 인간에게 사랑을 나타내시고 때로는 진노의 심판으로 사랑의 격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도 우리에게’ 주시사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진노 아래 놓인 우리를 구원코자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신'(골1:22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빌3:18)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셔서 온 인류가 구원 얻기를 간절히 소망하십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원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9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십니다. 이로 인하여 화평, 친목, 상호간의 사랑이 이룩되었으며 화목한 삶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된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3:1) 우리의 과거는 하나님과 원수였으나 이제는 그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누릴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모든 생활에서 그에 대한 사랑을 반영하여야 합니다. 현재의 구원받은 상태를 끝까지 확신하고, 미래를 기대하면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화목을 이루신 그리스도 (롬 5:11)
하나님께서 처음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세상에는 미움과 다툼이 없고 평화로움만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은 서로 친밀한 관계였고 역시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화목과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의 평화는 깨어지고 미움과 다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단절되었고,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였으며, 뱀과 여자도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창3장) 인류의 다툼은 이때부터 시작되어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가 되었으며 인간을 끝없는 불행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이 처음의 화목한 상태로 회복되길 원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ㅅㅂ자가는 곧 화해의 십자가이며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믿는 자는 모든 불행의 원인인 다툼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요14:27)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화목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화해의 재물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은 선에 대해서는 축복으로, 악에 대하여는 진노의 심판으로 갚으십니다. 범죄한 인간에 대하여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을 견딜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들이 다 죽는 것은 또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 위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죄에 대해 인간의 대표로서 자신을 죽게 하여 죄의 심판을 담당하시고 인간을 의롭게 하셔서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롬5:15-19) 즉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의 희생 제물같이 자신을 직접 제물로 드리셔서 인간의 죄와 세상의 불화를 해결하시고 창조 때의 화목으로 회복하기 위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십자가의 화목에 참여할 것이며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참된 평안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가 이루신 화목
1)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 악과 함께 계실 수 없으십니다. 따라서 범죄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으시고 화염검으로 동산을 두르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창3:24) 결국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의 생명의 근원은 창조주에게 있으므로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자연히 죽을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의 희생을 치루심으로 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은 새로운 생명을 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화목을 얻은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생명의 구원자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화목한 자는 다시는 죄와 화목해서는 안 됩니다. (롬6:6) 나아가서 구원 받은 자는 더욱더 율법의 요구에 충실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기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2)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타락의 원인을 서로에게 전가시켰습니다.(창3:12) 이러한 행동은 바로 전까지 하와를 향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하던 사랑의 마음이 파괴되고 서로 불신하며 미워하는 마음까지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은 서로 죽이는 행위를 범하게 되고 인간의 역사는 서로를 죽이고 죽는 투쟁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미움과 다툼을 제거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 단절된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새로운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눅10:27)고 가르치셨고 또 그것을 몸소 행하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이웃에 끊임없는 사랑을 베풀어 사랑을 이루라시는 화목의 교훈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요일4:12)
3) 인간과 자연 사이의 화목
인간을 위해 아름다운 과실과 채소를 맺던 땅은 범죄 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창3:18) 인간은 짐승을 식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짐승은 서로 싸우며 생존을 위해 서로를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화목하게 하심으로 구속의 그 날에는 ‘이리가 양과 함께 거하고…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사11:6-9) 참으로 화목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입니다. 신자들은 바로 이러한 날이 오기까지 이 세상에 살면서 화목과 평화를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1) (롬 5:12)
한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과 구원의 은혜에 들어감을 강조하는 앞부분과 이 구절은 대조되어 더욱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로 인하여 그의 모든 후예들이 죄악 가운데서 허덕이고 있는 것을, 그리스도 한 사람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구원의 은혜를 바로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자신의 죄악의 실상을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 죄악의 실상을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담은 세상에 죄를 가져왔습니다.
1) 죄의 기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이 아름다운 우주에 죄가 도입된 것은 아담에 의해서 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을 아담을 위해 온전히 아름답게 지어졌고 이 세상에 사는 아담도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지혜가 충족한 상태로 모든 피조물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겔28:11-19;사14:12-15;계12:3,4) 그러나 사탄에 의해 꾀임에 빠진 아담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죄의 의미
죄의 의미는 원래 ‘과녁을 빗나가다’ 혹은 ‘금지된 선을 넘다’는 뜻으로써 아담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금지된 나무의 실과를 먹어 불순종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 인간의 태도나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죄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과 잘못을 범하기 쉬운 인간의 죄 된 경향 모두를 포함합니다. 결국 아담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과녁을 맞추지 못함으로써 죄인이 되었고 그 이후로 타락한 본성에 의해 선에 대한 무능, 죄의 경향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의 후예인 우리들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2. 아담의 죄는 세상에 사망을 가져왔습니다.
1) 그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
아담의 죄의 결과는 일차적으로 땅과 아담 자신에게 저주로 나타났는데 아담은 저주를 받아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땅에서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내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심하게 겪어야 자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고 그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창3:16-19) 그리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2) 여자의 후손에게 심판과 저주가 전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저주하실 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원수가 되어 사탄의 후손으로부터 발꿈치가 상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사탄의 세력이 여자의 후손 곧 그리스도를 괴롭힐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 했을 때 이미 구속까지 섭리해 놓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아무튼 이로 인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큰 고통을 치르셔야 했습니다. 그는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 대가를 온 몸으로 치르셔야 했던 것입니다. 아담의 죄,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늘날 우리가 범하는 죄는 이처럼 막중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3) 모든 인간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그에게 속한 인간 모두는 죽음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첫째 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죄의 결과로 본래의 것인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육체적인 죽음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창3:19)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저주로 제한된 연수를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에 슬픔과 고통뿐이 없음을 안타까와하고 있습니다.(시90:10) 둘째로, 영적 죽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모든 인간은 육체적인 죽음 뿐 아니라 하나님께 멀어져서 더 이상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곁을 떠나게 되었듯이 그의 후손도 그들의 불법 때문에 하나님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둘째 사망의 경지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7:23)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제시받았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빗나가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죄이며 그 죄로 인해 그 자신 뿐 아니라 인류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한 사람의 말미암은 죄(2) (롬 5:12)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들어온 죄에 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 하였고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야 말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피를 받은 후손도 죄인임을 말하면서 또한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즉 아담이 지은 죄가 전 인류에게 미친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죄의 영향과 성향을 살펴보겠습니다.
1. 죄는 세상에 침입하여 왔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죄가 없는 상태의 세상에 죄가 침입했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침입한 이후로 세상이 죄로부터 자유로웠던 기간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전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그것을 낙원이라 부르셨습니다. 또한 그곳에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 살게 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창1:1-31) 그때는 그곳에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죄가 침입하였고 인간은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범죄를 유발하는 반역과 불순종으로 이끌었으며 우리의 영을 계속 오염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2. 세상에 들어온 죄는 활동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죄를 의인화 하여 설명합니다. 즉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죄가 왕노릇한다’고 말합니다. 죄에는 이와같이 활동성이 있습니다. 죄는 마귀의 인격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창3:1-4) 죄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는 인간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들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켰습니다. (시52:3) 그 결과 인간은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요8:34) 이러한 죄의 활동의 결과는 여러가지로 나타납니다. (요일5:17) 그것은 불순종, 불법, 불의, 시기, 분열 등으로 나타납니다. (요일5:17) 죄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이며 혐오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이러한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대신에 죄가 인간의 전인격을 지배합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한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습관이나 실제 행동들이 죄에 의해 완전히 조종되고, 인간은 그것에 복종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죄는 인간의 전부분에 역사하는 활동성을 가진 것입니다.
3.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죄의 결과로 찾아온 것은 사망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필연적으로 영적인 죽음까지 초래합니다.(요9:41) 죄는 죽음이란 재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에덴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아담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고 말하였습니다. (고전15:56) 죄가 아니라면 아담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창조가 완전하고 죄와는 무관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의 한 행동이 그를 사망으로 몰아넣고야 말았으며 그가 취한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창3:19)
4.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죄의 유전성은 모든 인류의 각 개인에게 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롬3:23) 단 한명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죄가 유전되므로 그에 따르는 죽음의 형벌 또한 유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결과가 한 사람의 불순종에 의해 그 죄를 받은 모든 후손에게 미친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의 직접적인 결과로 죄가 인간의 생명과 인류의 역사 가운데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의 죄가 전 인류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빛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속하는 거룩한 어린 양의 보혈이 우리 가운데 보내시고 죄를 담당케 하셨습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죄를 덮어버림으로 더 이상 우리에게서 죄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쁨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율법의 의의 (롬 5:13)
바울은 본장 12-21절에서 죄가 세상에 어떻게 들어왔으며 그 죄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해 왔는지를 설명합니다. 또한 그 죄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해서 정복하시고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셨는지도 설명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문은 율법의 가입의 의의에 대한 설명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본문에 나오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의의는 이것만으로 만족될 수는 없습니다. 그 율법의 의의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죄를 드러냅니다.
율법의 의의 중 첫째는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범죄 이후로부터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까지도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그 죄의 결과로 주어진 형벌은 세상을 지배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행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죄 자체에 대한 의식조차 없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가운데 죄와 더불어 살면서 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범법함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시고 인간으로 죄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 율법이 인간을 하나님 앞에 조인으로 고발하여 인간의 죄 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공고히 세우고 증거하여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행위로써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2.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의를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것으로 한정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달아 죄인임을 스스로 인식한 인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갈3:24) 이것이 율법의 두번째 의의입니다. 옛 그리스의 귀족들은 6세에서 16세까지의 어린 자녀들의 생활을 보호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그의 집에 거하는 신뢰할 수 있는 노예를 택하고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했는데 이 직무를 맡은 자를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이 직분을 받은 자는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가정교사와 후견인으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몽학선생은 자연히 아이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몽학선생의 훈육기간은 잠시였으며 이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나면 그는 노예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즉 아이가 성년이 되면 그 아이는 몽학선생의 감독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한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리면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가정생활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바로 그리이스의 이 몽학선생 제도를 그의 논증을 도입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율법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무력한 인간의 후견인으로 생활을 감독하고 보호하여 죄악을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억제시킵니다. 때문에 율법은 인간에게 귀찮고 까다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후견인으로서 율법의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멈춥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년이 된 성도는 더 이상 후견인의 지도와 감독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참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의 이 율법의 역할과 기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셈이며 죄인의 구원에 큰 역할을 한 셈입니다.
3. 구원받은 자의 삶의 지표가 됩니다.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세번째 의의는 그것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의 삶의 지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롬3:27) 율법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그것 자체로서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율법의 존재가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며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며 인간의 삶에 있어서 선한 삶을 살기 원하는 자들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믿음은 마치 살아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약2:18) 과일나무의 뿌리의 튼튼함이 그 열매를 통하여 입증되듯이 믿음도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발전하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 백성으로 선언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킴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과 영화의 계획을 성취합니다.
왕 노릇하는 사망 (롬 5:14)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하고자 하는 바울은 먼저 모든 인생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과 그 원인은 인류가 계약의 대표자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악 때문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본문을 통해 죄와 사망의 관계, 그리고 죄를 죄 되게 하는 율법과 계약의 대표자이신 아담과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망의 근원으로서의 죄
1)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바울의 인간관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데 그 주안점이 있습니다. 죄와 그의 열매인 사망이 아담을 통해 맹위를 떨치는 세력으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12절) 이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 또는 항거,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입니다. 하나님은 옛날에 흑암에서 빛을 내도록 명령하신 자이며, 인간을 창조하신 자입니다. (창1:3) 그러므로 인간의 악, 곧 죄는 창조자로서 생명의 근원인,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피조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유 신의 생각을 좇는 자이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므로 이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롬8:7,13) 이것이 죄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2) 사망의 근원은 아담의 범죄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도 전에, 즉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한 것은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그로 인한 범죄가 아닌 , 보다 궁극적인 범죄가 있음을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의 원죄’입니다. 하나님과 생명을 걸고 계약한 인간의 대표자 아담과 함께 우리 모두는 계약의 동참자가 되었고, 아담의 범죄와 함께 우리는 역시 계약의 파기자가 되어 결국 모든 인생은 앞으로 태어날 자들까지도 생명을 상실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류는 왕노릇하는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밖에 없는 무능력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대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모든 것보다도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우리의 생명을 상실케 한 ‘아담의 죄’,’원죄’인 것입니다.
2. 죄인 위에 왕 노릇하는 사망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조의 열매인 사망을 절대적이요 보편적이며, 지속적인 권세를 지닌 막강한 군주로 묘사합니다.
1) 사망의 권세는 절대적입니다.
범죄하는 인생에게 있어서 사망은 필연적입니다. 그것은 예외나 유보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그 권세를 뿌리칠 수도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인생은 언젠가 하나님이 정하신 그때, 자신의 죄악의 열매인 죽음이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2) 사망의 권세는 보편적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임합니다. 부자도, 부자의 문 앞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생명을 연명하는 거지 나사로도 모두 죽음 앞에서는 평등했습니다. 죽음을 권세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으며, 평생을 비참하게 산 자라고 해서 동정하지도 않습니다. 알렉산더에게도 나폴레옹에게도, 로마의 시이저와 폭군 네로에게도, 그리고 유명한 소설가와 시골의 가난한 촌부에게도, 늙은이에게도 어린아이에게도 죽음을 차별을 두지 않고 임합니다.
3) 사망의 권세는 지속적입니다.
사망의 권세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아담으로부터 성군 다윗의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권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주께서 완전히 그 권세를 물리치는 그때까지 계속해서 역사할 것입니다. 그 권세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는 바울 사도의 증거대로(고전15:26) 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이나 권위, 지배자 보다도 오래도록 남아 죄인 된 인간을 지배할 것입니다 .
3.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길
인간이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행4:12) 즉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통해서만 죽음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심으로 사망에서 벗어나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의지함으로 참된 자유를 누려야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요10:7)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은혜(1) (롬 5:15)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의 특유한 논조를 구사합니다. 특히 본문의 구절은 더욱 그러한데 그것은 대조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순종과 불순종, 할례와 무할례,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등이 바로 그와 같은 대조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한 사람의 범죄가 전 인류를 사망에 이르게 함같이 한 사람의 완전한 순종이 많은 사람으로 의롭게 한다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상황의 대전환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1. 대립적인 두개의 주권
1) 죄의 주권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롬5:12) 죄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몇 가지의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 첫째는 사망입니다.(롬6:23) 그것은 영육 간에 미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창3:19)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이 초래한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한 개인으로 범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류의 대표자였으며, 그로 인하여 그가 지은 죄는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둘째는 불화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전 역사에 나타난 사건을 통하여 이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아담은 범죄한 후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으며(창3:10) 그 후손은 역사상에 계속적인 범죄를 자행해 왔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또한 인간과 인간이 불화하여 아담은 하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려 했습니다. (창3:12) 그리고 인간의 범죄는 자연과의 불화도 가져왔습니다. 자연을 지배하며 다스릴 특권을 받았던 인간이 자연의 위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인간의 무능력입니다. 인간은 종종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죄로 인해 초래된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결코 극복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은혜의 주권
죄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장하는 곳에는 인간에게 소망과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는 인간에게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그에게 나와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실현하십니다.(롬4:20) 둘째는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인생의 순례과정에서도 보호하시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히4:3) 셋째는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빌4:13)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2.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
바울은 로마서에서 특히 두개의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것은 ‘아담’과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은 죄를 상징하고 그리스도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아담은 죄악에 미혹당하여 타락의 길을 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경고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공의가 담겨져 있으며, 절대적인 책임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그러한 주님의 명령에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행동이 얼마만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발적이면서도 순종적인 희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26:39) 또한 율법에 대한 가장 완전한 순종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롬10:4)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면 그리스도는 순종으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3.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수리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요1:16) 하나님은 은혜는 영원토록 계속해서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했습니다. (엡2:9)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헤아릴 수도,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를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무한정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은혜(2) (롬 5:15)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면서 구속사적 관점에서 두 사람을 제시합니다. 그 두 사람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류는 두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서 커다란 변화의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것은 ‘범죄와 의’이며, ‘사망과 생명’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인류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게기를 찾았습니다. 바울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하여 설명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선포합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아담의 범죄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여기서 ‘한사람’이란 것은 ‘아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 아담의 범죄는 교만과 이기주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심으로 자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약 불순종할 때에는 죽음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하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유혹할 때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창3:5)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서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결정하겠다는,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또한 뱀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는 유혹에(창3:5) 넘어감으로 인간의 중심인 하나님을 몰아내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교만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2)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나타난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파괴로써 사망이 이르른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롬5:12)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결국 아담은 모든 인간의 대표로 행동하였고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은 스스로가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함으로 범죄하고 그 결과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6:23)
2. 하나님의 선물
‘그러나 이 은사는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여기서 ‘은사’는 원어에서 인간 사이에서 교환되는 일반적인 선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높고 귀한 선물을 가리키는 말로 최고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1) 이 선물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시기 위해서 구원을 이야기하셨고 그래도 불순종한 인간을 위해 가장 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의롭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행위는 경건치 않다 할지라도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확고한 사실입니다. ‘일하는 자엑;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4,5)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2) 이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그런 분이 십자가에 달려 정죄 받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 이러한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이러한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이 이르렀고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 (롬 5:16)
중국의 철학자 공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여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한 것이므로 교육을 통해 선한 본성을 고양시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서(17절)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었으므로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롬3:10)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의 보상은 오직 사망밖에 없습니다. (롬6:2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은혜를 베푸셨으니 곧 그리스도 예수를 화해의 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본문을 통해 죄의 근원인 아담과 은혜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러면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죄의 근원인 아담
1) 인간의 대표자 아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창1:28) 그래서 인간을 기계와 같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창1:27) 만드시고 하나님의 지, 정, 의를 가지게 하셔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발적인 섬김을 허용하시기 위하여 선악과를 만드시고 그 과실을 따먹지 말도록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아담 개인과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아담의 이름이 상징하듯이 모든 인간과 맺은 언약이며 아담은 그 대표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죄는 아담 개인의 죄가 아니라 아담의 후손인 전 인류의 죄인 것입니다.
2)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죄
언약의 파기로 인해 아담에게 내려진 죽음이란 형벌은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이란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떠난 인간은 당연히 세상 권세자인 죄의 종노릇(17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원죄와 그로 인한 인간의 부패와 타락한 마음은 죄가 왕노릇을 하게 됨에 따라 더욱 더 부패해져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담의 죄를 통해 들어온 마귀의 지배 아래에 놓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2. 은혜의 근원인 그리스도
1) 인간의 대표인 그리스도
비록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나 사랑의 하나님은 그래도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로 인해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죄인인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없는 희생의 제물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인간의 몸으로 보내신 것은 죄가 없는 희생 제물임과 동시에 구원받을 인간의 대표성을 지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구약시대에 죄를 씻기 위해 대신 죽은 어린 양의 희생제물(레4:32)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죽게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아담으로 오셔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히7:27) 인간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깨끗케 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으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온 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시기 이전에 죄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을 없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원의 완성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온 죄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정복하심으로 인간이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도록 (롬6: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원인인 죄에서 떠난 인간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이 모든 자에게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죄를 씻는 희생의 피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죄는 인간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피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들고 나아가는 방법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피가 구속의 피임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롬3:25)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후에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의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딤후2:12)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 (롬 5:17)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다소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어떠한 형태로든 죽음을 맞이하는 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이러한 죽음을 피해보고자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죽음은 역시 황제도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운명이었습니다. 이렇듯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죽음이 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죽음이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무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죽음의 사신을 두려움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육체적 죽음보다 더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권세 아래 갇히게 되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1. 영원한 죽음
1) 죽음의 원인인 인간의 타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고생을 하며 살다가 결국은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영원한 죽음, 곧 영적 사명 외에도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육체적 죽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2) 죽음의 기독교적 이해
많은 불신자들은 육체적 죽음이 이 세상, 그리고 자신의 삶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육체적 죽음의 의미는 매우 다릅니다. 세상의 죽음은 결코 모든 것의 종말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 안에서 지나쳐 가는 하나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뇌, 곤궁, 질병, 비참, 고민, 재난, 고통, 번민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은 말할 바도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절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떠나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 질벙이 아닌 영적 죽음이며 궁극적인 죽음입니다.
3) 영원한 죽음
19세기의 천재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진정한 죽음을 ‘절망’이라는 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에서의 절망이란 그야말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절대적 위기에 처해있는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이 영원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속을 통해 직면한 영원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2. 의인과 확실한 구원
1)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는 인간의 의로움이나 정당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선물입니다. 이것을 의롭다 칭함(칭의) 혹은 의롭다 인정함이라 부릅니다. 곧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인정으로 구속받는 것입니다.
2) 대속의 은총
바울은 분명히 인간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롬4:1-25) 여기에서 우리는 대속의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속은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살리는 오묘한 희생입니다. 이는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고 기적 중에서도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도 하고, 대속의 믿음이 우매하다고도 합니다. 그러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도 하고, 대속의 믿음이 우매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입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아담에게서 비롯된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유일한 길이요 힘입니다.
3. 참 생명 안에서 왕 된 우리
1) 참 생명을 소유한 기쁨
생소한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의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열심으로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였습니다. 그가 그러한 중에서도 느꼈던 가장 주된 기쁨은 역시 생명의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삶의 환희였습니다. 오랜 동안의 선교 여행을 통해 여러번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그러한 삶 때문에 기뻐하고 심지어는 로마에서의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영원한 생명의 힘
위와 같은 사도 바울의 강인한 의지는 그야말로 인간의 갖은 고통과 번민과 질병, 급기야는 육체적 죽음까지도 재앙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인내는 연단을 주고 연단은 소망을 주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 소망은 성령이 주는 자랑스러운 선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롬5:4,5)
그리스도인의 확신(1) (롬 5:18)
바울은 본문과 다음 구절에서 5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서 결론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범죄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율법의 정죄함을 받아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의의 한 행동,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사망에서 의와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는 모두 심판과 징벌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행한 불순종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의 대우를 받는다고 밝혔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지명하셨습니다.(창1:28) 하나님은 아담이 전체의 대표가 될 것과, 그의 행동의 열매를 전인류가 누려야 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함께 그 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역시 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지위란 재판상으로 죄인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아담의 불순종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3:15)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 전체가 죄인으로 규정되었으며 죄인의 범주에 들게 된 것입니다. 죄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그 마음속에서 온갖 악을 생각해 내고 또한 악한 일만 행하며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죄인이며, 심판의 대상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순종으로 의를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것이 확실한 만큼이나 우리가 의인되었음을 역설합니다. 이는 둘째 아담되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한 것입니다.(히5:9)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로부터 오며, 그 안에 있습니다.(요10:9) 나의 죄인됨이 전적으로 아담에게서 온 것처럼 나의 의와 구원도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순종 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첫째로 그가 제정하신 율법 아래로 자신을 굴복시키고 낮고 천한 인간의 자리에 오시어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요1:14) 둘째로 희생에의 능동적인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았습니다. (사53:7) 주님은 자발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순종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죄 된 신분이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주님의 이와같은 순종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명제를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전체의 대주제입니다.
3. 사망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칭의는 사죄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의 종 노릇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사50:8) 우리는 생명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입니다.(고후1:7) 이미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대속제물로 삼으셨습니다.(고전5:21)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죄는 오직 우리가 사는 날 동안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죄인 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사망의 영역에서 벗어났습니다.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며 이제는 은혜가 우리에게서 왕노릇합니다.(요1:16) 이 진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이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시34:7)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요17:12) 하나님은 성도를 구속하시기만 하시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안전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끊을 자가 없으며(고후13:5) 성령께서 그 길을 인도하십니다.(고후1:21,22) 이러한 삶의 실제적인 인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2) (롬 5:18)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의 타락과 구원을 대표합니다. 즉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였으나 그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심판아래 놓여 고통당하고 멸망당하는 인간들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타락한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또 한사람 아담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러면 그러한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어떻게 구원이 임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의와 행동
1) 순종하셨습니다.
아담이 범한 죄의 핵심은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먹음으로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 모든 인생에게 사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고전15:21) 이처럼 불순종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며 죄악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하셨던 것입니다.(삼상15:21)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순종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순종하셨습니다. 거리낌이나 억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죽기까지 온전한 순종을 하셨던 것입니다.
2)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온전한 순종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믿음으로 자기의 가장 소중했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듯이(창22:3-18) 그리스도도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하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그 희생은 흠없고 온전한 어린양의 범죄한 인생을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시고 고난과 죽음을 자처한 희생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인간의 원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또 온전한 순종의 모범이 되시기 위하여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심으로 자신을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둠과 죽음의 권세에 놓여 인간에게 희망과 기쁨이 가득한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의의 결과
1)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은 구원의 복음을 믿는 자로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요3:16) 즉 이 구원은 부자나 힘있는 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만을 위한 복음도 아니며 의인만을 위해서, 선한 자만을 위한 복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열려져 있으며, 모든 사람을 위해서 열려 있져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오직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구원의 가능성을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에게 만연된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에게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의 길이 열려져 있음을 뜻합니다.
2)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의롭다 하심’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에는 커다란 능력이 있어서 더러운 것도 깨끗하게 하며, 죄를 성결하게도 합니다. 즉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더러운 죄악을 깨끗하게 하며, 죄를 성결하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살감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이 은총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희생의 피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3)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은 결과 모든 인생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생명에 이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12절)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그래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망 아래 놓인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커다란 은총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의 어린 양으로 삼아 완전한 재물로 삼음으로 그것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심으로 모든 사망의 권세를 무찌르고 영원한 생명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과 순종이 갖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순종치 않은 자와 순종한 자(1) (롬 5:19)
바울은 본문에서 순종치 않은 자와 순종한 자를 대비적으로 묘사하여 표현했습니다. 순종치 않는 자는 아담을 가리키고 순종한 사람은 예수를 가리킵니다. 본문은 앞에 나오는 18절의 내용을 반복해서 그 근거를 규정짓고 보충설명을 해주는 말씀인데, 여기서는 법적 관계를 떠나 순종에 관한 면에서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을 깨우쳐 줍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순종(복종)을 척도로 두 사람을 비교하는 논리는 빌 2:8을, 또는 히5:8,9를 따랐습니다. 어쨌든 순종할 것이냐 불순종할 것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던져진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결단을 내리고 살아야 할 문제입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순종치 않은 자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불순종이 이렇듯 모든 인류에게 죄의 굴레를 씌우게 할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한 순간의 실수가 영원히 돌이킬 수가 없는 죄악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 현상은 지금도 우리에게서 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잘못한들 무슨 그리 큰 문제가 있을까? 나 한 사람이 빠지는 데 흔적이 날까? 이러한 생각이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켜 작은 실수가 큰 죄악을 일으키는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비유로 든 탕자의 경우에도, 탕자는 자기 한 사람이 편하고 자유롭게 살겠다고 아버지 말씀을 불순종하고 객지로 나갔으나, 그의 그러한 행동이 온 집안의 화목을 깨고 식구들에게 불행을 야기시킨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눅15)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화를 자초하는 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 나 한 사람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물론 알지 못하는 미지의 사람과 장차 올 후세 사람들에게까지도 엄청난 재앙을 뿌리고 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며 사랑하시고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거친 산과 들을 헤매십니다. 한 사람의, 하나의 목숨이 소중하고 그 책임이 크심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간 한 사람의 작은 탐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수많은 백성들이 전장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 사례도 있습니다.(수17:19) 그같은 일은 역사에 무수히 나오는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왜 같은 실수가 반복되고 예기된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할까요? 성경에서, 아담에게서 바른 교훈을 가슴깊이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2. 순종하는 자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의 순종이 많은 인류에게 의인으로 인정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지은 죄악이 세상을 죄악으로 가득 차게 하였으나 예수님은 순종하심으로 그 죄를 덮어버리시고 (가리우시고),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칭호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삼상15:22)라고 사울왕을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좋아하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독생자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에 따른 헌신과 희생이 많은 사람을 살린 사실은 역사상 많이 있으나 예수님의 순종은 전인류의 생명을 사망에서 건진 유일무이한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3. 순종의 성경적 의의
모든 인간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은 구원과 멸망의 두 길 중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은 마치 뿌리없는 풀처럼, 파도와 함께 일어나는 물거품과도 같은 것으로 영원하지를 못합니다. 그 끝에는 구원과 멸망이 있으며 이 사실은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듯이 확실하고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범주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순종을 따라 삶으로써 영생을 얻을 것이냐 한 사람이 불종한 것을 따라 영멸을 할 것이냐 하는 결단이 우리 신앙의 요체가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것은 우리를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살리는 길입니다. 어버이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식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제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교회에게 축복이 임하리라는 믿음은 당연하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항상 복종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빌2:12) 바울의 이 권고는 이 시간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순종치 않은 자와 순종한 자(2) (롬 5:19)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는 죄와 전혀 무관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해서 행위가 완전한 의인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여전히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권세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아래 있으며 죄의 결과인 사망에 이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성도의 죄와 사망과의 무관성을 증명하고 확증하기 위해 본문은 물론 본장 전체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특히 그 무관성을 역설하기 위해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그 의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아담의 불순종
1) 죄의 근원은 불순종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그것을 명백히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타락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그로 하여금 되돌아올 수 없는 타락의 길을 걷게 했습니다. 인간 세계 속에 현존하고 있는 수많은 죄악은 이 불순종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담의 불순종은 인류의 범죄의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죄로 하여금 맘대로 세상에 침입하도록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죄는 아담의 불순종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들어왔고 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만악의 씨앗이 되어 이후 그들의 후손을 통해 많은 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살인, 탐욕, 간음, 우상숭배 등 모든 죄악은 아담의 불순종이 근원이 되어 이 세상에 보편화된 죄악은 아담의 불순종이 근원이 되어 이 세상에 보편화된 죄악의 열매들입니다. 그리고 이 불순종은 오늘날에도 보편적 죄악의 근원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존재합니다. 특히 이 불순종은 불신앙을 포함함으로써 더욱 무서운 죄를 격발시킵니다.
2) 아담의 불순종은 죄를 이 세상에 끌어들이는 결과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단번에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안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첫 언약을 체결하실 때 그는 전인류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고 당시 우리는 그의 안에 있었습니다. 이 원리에 의해 그의 불순종은 그 개인의 불순종이 아니라 전인류를 대표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안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자연히 죄인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독특한 진술이지만 주관에 치우친, 오류가 섞인 진술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을 바로 이해했으며 정확한 성경이해가 그로 이러한 진술을 하게 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아담의 불순종은 인간 모두를 불순종의 아들들로 만들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순종
1)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의 순종에 대해서는 복음서와 서신서들이 확실히 증거해 줍니다. 그는 먼저 율법이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준수하셨습니다. 그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으며(눅2:21) 십이세 되던 해에는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눅2:42) 죄가 없으시면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마3:13-15 율법이 정한절기를 지키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갈4:4)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그는 율법의 지배를 받으셨고 그것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세는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셨음을 배워야 합니다.(마26:42)
2)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표해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순종의 보다 더 깊은 의미는 그의 순종이 우리를 대표한 순종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율법에 흠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완벽하셨습니다. 그에게도 우리에게와 마찬가지로 많은 죄의 유혹이 있었지만 능히 그것을 물리치셨고 율법에 철저히 순복하심으로 온전히 의를 이루셨습니다. (눅4:1-13) 그러나 이는 단순히 그의 능력의 광대함을 드러내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대표자이셨기 때문에 그는 의를 ㄹ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그는 철저한 복종을 통해서 의를 이루셨고 이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죄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럼 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 됨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를 죄인되게 함과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인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미입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1) (롬 5:20,21)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 구원론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뿐만 아니라 율법을 여러 경우에 적용하고 해석한 그들은 미쉬나와 구전 전승들까지도 철저하게 신봉하며 남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자신들의 율법적 선행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의 행위 구원론을 거부하며 오직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앞에서 율법은 그들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의를 자랑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만이 구원의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기능
1) 죄를 드러내는 율법
바울 사도는 20절에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 때문에 죄를 많이 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으로 인해 인간의 범죄가 많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선하고 온전한 것이기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타락한 인간이 죄를 범해도 깨닫지 못했으나 율법이 주어졌을 때에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생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롬3:20) 그러므로 율법은 죄를 사해주는 구원의 길이 아니라 모든 세상으로 드러난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롬3:19)
2) 회개케 하는 율법
그러나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단지 인간의 죄를 드러내어 진노 아래 두고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정한 사망의 형벌밖에 기다릴 것이 없음을 깨달아(롬4:15) 오직 인간을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인간의 힘에 의한 구원의 획득을 포기하도록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길을 기대하도록 만드는 것입ㅁ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인한 회개는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에 바울 사도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20절)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2. 율법의 완성자인 그리스도
율법이 비록 인간의 죄를 드러나게 하며 인간의 구원을 얻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고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롬2:13)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반드시 율법의 온전한 실천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요구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까지도 합치된 완전한 순종이므로(마5:21-32)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대신해서 구원의 요구 조건인 율법을 완성시킬 분을 보내셨는데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형식 뿐 아니라 사랑과 진실을 요구하는 내용까지도 온전히 이루시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칭의를 획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인간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인정받아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
1) 죄에서 해방됨
타락하여 선을 행치 못하는 인간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1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해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 죄는 더 이상 인간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어 인간은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된 것입니다.(롬6:6) 따라서 이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에서 떠나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2) 영생을 얻음
또한 인간은 죄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율법이 규정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므로 죄의 대가인 사망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고 그 대가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생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이 다시는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며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과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2) (롬 5:20,21)
본문은 죄와 은혜의 상관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죄는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습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죄를 범했고 죄는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하나의 법칙으로 굳어졌습니다. 인간은 원하지 않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이 법칙에 지배를 받습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것을 표현하여 이르기를 ‘죄의 왕 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왕 노릇 아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여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죄의 지배를 뚫고 이 세상에 들어온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의가 이 세상을 지배했듯이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그 권세는 죄의 지배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합니다. 이제 이러한 바울의 논증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죄의 왕노릇
1) 죄의 지배 아래 태어나는 인간
먼저 우리는 우리의 출신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선악간의 백지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 된 존재로 태어납니다. 우리는 죄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태어나며 본질상 하나님과 원수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4)라고 했으며 바울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엡2:3) 했습니다. 우리의 출신 성분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결정되었습니다.
2)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죄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죄의 통치를 받으며 죄가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며 살아갑니다. 어느 누구든지 죄의 통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요구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철학자들과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바울의 논증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죄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실수와 그릇된 결단, 혹은 제반 사회적 모순의 결과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의 존재와 그 권능을 인정하여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라고 했습니다. 곧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죄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3)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인간
죄의 지배 아래 태어나고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인간은 곧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본문은 이를 명백히 밝혀 줍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을 후원해 줍니다. 죄의 통치 아래 있는 자들을 사망의 지배 아래 둡니다. 먼저 인간을 영적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한 자로 만듭니다.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시를 보아도 알지를 못하게 합니다.(마13:13) 둘째로 인간의 육체를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인간을 한시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것을 자각하게 해 스스로 절망하도록 만듭니다. 실로 죄의 왕 노릇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은혜의 왕노릇
1) 흘러넘치는 은혜
바울의 논증에 의하면 죄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인간의 사망과 고통의 모든 근원은 죄입니다. 죄는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이러한 죄의 심각성을 밝힌 후에 그는 이제 그가 본래부터 말하고 싶었던 논증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죄의 대칭되는 은혜에 관한 논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 은혜를 내리셨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이 은혜는 범죄와 같지 않습니다.(15절) 즉 죄의 권능과 통치와 상쇄될 만큼만의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단숨에 덮어버릴 만큼만의 권능은 죄의 권능보다 우월합니다. 이것을, 이러한 은혜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2) 왕으로써 지배하는 은혜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은혜는 죄의 권능을 일시적으로 덮어버리는 단회적인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은혜를 하나의 인격으로 묘사합니다. 은혜는 하나의 거대한 권능을 가진 인격자입니다. 그는 죄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권능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아담의 범죄를 통해 죄가 이 땅에 침입해 왔지만 그 자리에 은혜가 재침입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이 땅에 왕노릇했듯이 이제는 은혜가 왕노릇합니다. 은혜가 우리의 지배자가 된 것입니다. 이 은혜는 강력한 지배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지배하에 있는 백성들은 절대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지배 아래 한 번 들어간 자들은 사망과는 무관한 자가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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