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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창고 –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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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예화창고 – 날마다 죽노라 여러가지 이유로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중간에 멈출 수 밖에 없는 실패한 생애가 된다. 누에의 모본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날마다 새로와 지는 경험을 체험하기를 빕니다. 날마다 죽노라 농촌에서 짧은 시간에 목돈을 마련하는 방법은 누에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씨로부터 부화를 해서 고치를 따서 출하하기 까지 30일이면 작업이 끝나는 일이다.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듯하지만 해마다 봄과 여름철에 누에고치를 생산하는 일은 수고한 보람이 있었다. 누에는 5령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시기까지 온도와 습도, 그리고 먹이를 시간에 맞추어 보살펴 공급하지 않는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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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창고 –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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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 노라 |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이찬수 목사 : 갓피플Tv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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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나는 날마다 죽 노라 |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이찬수 목사 : 갓피플Tv 답을 믿으세요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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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나는 날마다 죽노라
god saves us
“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15장-나는 날마다 죽노라
[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29-34)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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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 아이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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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 아이굿뉴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탄식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육을 죽이기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선포했습니다.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 아이굿뉴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탄식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육을 죽이기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선포했습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우리 안에 두 마음이 공존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영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육은 악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두 마음이 우리 안에서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웁니다. 서로 거스르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롬 8:6절 이하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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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 아이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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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Body Mobile – ¿¹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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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Body Mobile – ¿¹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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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국교회가 맘몬주의, 교회세습, 교권주의 등으로 세상 속에서 참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조롱하고 비난합니다.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습에 실망해 교회를 떠납니다. 서글픈 일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높아지려하고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향한 고백을 삶으로 살아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도 매일 죽여야 할 ‘자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듯이 우리도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교회가 삽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목회는 내려놓고 죽는 훈련이다. 성도들을 이기는 것은 내가 지는 것이고, 성도들에게 지는 것은 내가 이기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실천하기까지 사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가 죽어야 성도가 살고, 성도가 죽어야 교회가 부흥됩니다.”
왜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이 어려울까요. 우리 안의 죄성은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겸손이 중요하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머리론 알고 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죽는다’는 이 구절이 자기 삶에서 현실로 이뤄졌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는다고 해서 말씀이 이뤄졌다고 속단해선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자각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낮아지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었던 앤드류 머레이는 “반항은 죄인의 체질이다. 순종은 힘든 학습”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의미는 그의 눈높이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순종은 나의 기준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준에 맞춰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부인이 참된 순종입니다. 나의 바람과 기대를 내려놓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나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은 힘든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셨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낮아지는 훈련을 통해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바울 등이 그렇습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아래 말씀 회복과 영적 회복을 위해 운동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원조는 요시야 왕입니다. 그는 구약 시대에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말씀 앞에서 옷을 찢으며 회개했습니다. 우리도 말씀 앞에서 눈물로 통곡하며 우리의 고집, 교만, 죄악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위해 인간으로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낮아지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삶을 실천합시다.
김현길 목사
god saves us
[난해]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바른 해석은?
고전15장 29절-34절
글/扈一麥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장 31절)
고린도전서 15장을 가리켜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부활장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1절-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임을 논증합니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믿음을 각자가 다 가지고 있는 줄로 압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12절-28절에서 신자의 부활에 관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첫 열매로서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믿으십니까? 아멘! 우리는 장차 있을 우리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과거에 대한 믿음이라면, 신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미래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본래 초대 교회는 매 주일이 부활절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약 시대 안식일과 달리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 자체가 주님이 그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매주일이 부활절이었고, 매일 매일의 삶이 부활을 경험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의 삶은 언제부턴가 부활절은 일년에 한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적인 기념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 당시에 이미 그러한 현상들이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온데 간데 없고, 하나의 맥빠진 의식만 남아있는 절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부활절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부활절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이시간 본문 말씀을 통해 부활절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고, 삶이 부활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두가지 경우 모두 ‘믿는다’는 것은 현재를 의미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을 믿든, 미래에 일어날 신자의 부활을 믿든, 그 믿음의 시제는 항상 현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영원한 현재입니다. 믿음 뿐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삶 자체도 항상 현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부활의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부활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게 배우고, 이시간 이후로 부활의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이 말씀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라는 말은 휘페르 (υπερ) 라는 헬라어 전치사인데, 이것은 ‘위하여’ 라는 말 보다는 “앞에서”, 또는 “위에서” 라고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죽은사람을 위해 대신 세례를 받는 예식을 행하던 것은 당시에 유행했던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자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죽은자를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관련자료보기= [난해]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침례] 받을 수 있는가?
문제는 의식을 행하면서도 실제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앙에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절이 되면 여러 가지 의미있는 행사를 갖고, 의식을 거행합니다. 고난 주간에 금식을 하기도 하고, 특별 새벽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려보기도 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지거나 채찍에 맞거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가운데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삶은 계란을 먹는 것으로 부활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의식들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의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1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장차 있을 성도의 부활, 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의 믿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이 지금 현재도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현재 살아계신 예수님과 내가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생명의 관계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도나무의 진액이 가지에게 공급되어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예수님의 은혜와 생명이 지금도 나에게 공급되고 나를 통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30-32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들의 삶과 비교하여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과 부활의 믿음이 없는 사람의 삶을 대조합니다. 매일 맹수들과 싸워야 하는 검투사들의 삶은 하루 하루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삶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이면 죽을 목숨, 먹고 마시고 즐기자!” 라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들의 삶을 자신의 삶,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대조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들의 삶과 닮은 꼴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당시 로마나 에베소에서 고린도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건이나 풍습 등을 예로 들어서 알기쉽게 설명하였습니다.
특히 바울 자신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카타 헤메란 아포드네스코)라고 하므로써 참 생명의 삶이란 내가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며, 주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감동 감화를 따라 사는 삶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쉴새없이 파도가 덮쳐오듯이 고난과 핍박이 그를 덮쳐왔습니다. 특히 그는 에베소에서 검투사가 원형경기장 안에서 맹수들과 싸우듯이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문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까? 31절을 읽어 보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어떤 면에서 그의 삶은 검투사들과 같았습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눈앞에 일어나는 상황만 보면, 하루 하루가 너무 절망적이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삶,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때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런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어떤 때는 너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고후1:8,9) 이때마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면, 꼭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개입하시고, 성령께서 그를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은 줄 알았는데, 벌떡 일어났습니다. 넘어진 줄 알았는데, 오뚝이처럼 우뚝 섰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검투사로 에베소의 맹수들과 싸웠습니다.
우리의 삶이 원형경기장에 갇혀서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의 삶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상황에 눌려 낙심한 나머지 실컷 먹고 자고 TV나 영화나 보며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신앙생활도 아무 생각 없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럭저럭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다가 죽으면 천국 가겠지 뭐~” 이런 신앙생활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이런 신앙에서 무슨 경건의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무엇보다 부활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현실 도피에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로 도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래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과거를 회상합니다. 잘 나가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왕년에 어쩌구 저쩌구’ 하는 자기 자랑을 하며 위안을 찾습니다. 또한 과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집착합니다. 과거의 문제 때문에 현재 상황이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후자는 미래에 엄청난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꿈은 이루어진다!” 라는 자기 확신 가운데 현실의 절망을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삶은 항상 현재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으로 ‘추억 속에 존재하는 현재’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기대 속의 현재’입니다. 따라서 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가 힘들면 과거의 기억도 어두워지고, 미래도 암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가 잘 나가면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미래의 모습도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은?
왜냐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치열한 삶,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할 마음을 먹고 살았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이 말씀은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기위해 날마다 죽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면 죽을 각오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부활의 믿음으로 살 때 누구든지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 삶이 복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은 만남으로 율법의 죄가 다 용서 되었고, 복음을 전하다가 죽기를 원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를 자기를 왜 쳐서 복종하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도덕적인 죄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요즘 이 말씀을 곡해 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는데 사도바울은 복음 전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어도 좋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검투사가 맹수와 싸우는 것 같이 우리도 세상의 맹수들과 싸워서 승리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성도들이 자기 십자가를 집니까?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드는 마귀에게 잡혀 먹습니다. 지옥갈 죄의 문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 받은 이의 삶은 매일 매순간 우리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맡은바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삶이 매일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루를 잘 사는 것이 곧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탁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 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하루만 죽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만 잘하면 됩니다. 인생의 내일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만 주님 말씀에 잘 순종하면 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요? 주님의 증인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오늘 하루만 참고, 오늘 하루만 헌신하고, 오늘 하루만 희생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일 세상이 폭발하여 없어진다 하여도 밤에 눈을 감을 때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죽는 심정으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부활하는 심정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위해 죽기를 각오 하여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1장 22절-28절에『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날마다 죽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고 복음 전하기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33,34) 악한 동무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은 언제나 동일한 패턴입니다. “오늘은 쉬고, 내일 하라~”는 것입니다.특히 믿음이 아닌 것으로 다가와서 그럴듯하게 복음을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지옥갈 죄를 다 용서 받은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로 인해서는 육신의 생사화복만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는 육신적으로도 잘 살아야만 합니다. 복음전하기 위해서 참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상급이 있습니다. 과거에 잘 한 것 자랑하지 말고, 미래에 잘 하겠다고 맹세하지 말고, 오늘 잘 해야 합니다. 특히 복음 전하는 것을 내일 하겠다고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부활의 믿음으로 오늘 하루만 잘 합시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날마다 죽기를 원합니다.扈ⓗ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 (일맥)
메모 :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29-34)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한 성도가 세상을 떠나 제가 장례식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산에 올라가서 하관을 합니다.
일생을 통하여 가장 비장한 순간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던 사람이 었습니다마는 생명이 떠난 시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땅을 깊이 파고 광중(壙中)으로 관을 달아내립니다. 이제 관뚜껑을 열어놓고 마지막 예배를 드립니다. 하관 예배라고 합니다. 이때에는 주로 부활에 관한 성경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권면의 말씀을 드린 다음에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이렇게 헤어집니다마는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슬픔으로 헤어집니다마는 주님 앞에 가서 영광스럽게 만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먼저 가고 뒤에 가고 합니다마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공중에서 부활하여 다 같이 함께 만나 하나님을 찬송하게 해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를 드린 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예배를 마칩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전혀 낯선 분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마는 모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심각하게 두 가지의 질문을 저에게 합니다. 그 하나가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가 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추상적인 진리요 관념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생명으로 믿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둘은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부활할 것으로 믿는가보다’라는 것입니다. “부활할 것을 믿지요.” 이 말을 들은 그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심각해졌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질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내가 부활할 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까 생명의 문제는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생명의 문제로부터 가치관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자로 사느냐, 가난하게 사느냐-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공평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는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늙지 않고 가난한 사람만 늙는다고 해보십시다. 억울해서 못삽니다. 제 아무리 좋다는 약을 먹고 마사지를 하여도 늙기는 일반입니다. 도리 없이, 누구나 늙어간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평성입니다. 가령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죽지 않고 무식한 사람만 죽는다고 하면 억울해서 못 죽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생명문제 앞에서 사람은 공평합니다.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명문제를 크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여타의 문제를 작게 여길 수 있습니다. 잘살면 어떻고 못살면 어떻습니까 잘입으면 어떻고 못 입으면 어떻습니까 명예를 가지면 어떻고 못 가지면 어떻습니까 잠깐 사는 세상입니다. 사람마다 이 중요한 생명의 문제는 등한히 하고 오히려 별로 중요치도 않은 시시한 문제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보면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죽음을 재촉하면서까지 명예를 얻겠다고 아등바등합니다.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등산을 좋아하여 산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비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산에서 비를 만나면 큰일입니다. 경사가 가파른 산이고 보면 삽시간에 계곡 물이 붇습니다. 마구 흘러내리는 물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무 아래로 거센 물살이 지나갑니다. 밤새도록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나무가 부러질까 걱정하면서 밤을 지새우는데 춥기도 하고 배도 고프고 참으로 괴롭습니다. 더욱이 잠까지 옵니다. 여기에서 졸면 죽는다 싶어 허리띠를 풀어 나무에 몸을 붙들어매고 밤을 새웁니다. 물이 다 빠진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 죽을 뻔한 이야기를 주욱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가 이렇게 묻습니다. “얼마나 춥고,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어려울 때에 내 생각 좀 했습니까” 그러자 그 남편이 대답합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소. 단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소.”
그렇습니다. 생명의 문제, 그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시한 걱정은 안하고 살아도 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문제는 현실적입니다 마는 신비롭습니다. 곧 종말론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현재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나이많은 사람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는 날마다 죽음 앞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스럽다느니, 평안하다느니, 행복하다느니, 불행하다느니, 명예롭다느니, 수치스럽다느니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가 최우선적임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생명을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신분에 따라 죽음을 일컫는 말이 각기 다릅니다. 다섯 가지의 명칭이 그것입니다. 왕이 죽으면 붕(崩)이라고 합니다. 제후가 죽으면 몽(蒙)이라고 합니다. 우리말에도 몽거(蒙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벼슬아치가 죽으면 졸(卒)이라고 합니다. 선비가 죽으면 불록(不祿)이라고 합니다. 이제 녹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통사람이 죽으면 사(死), 곧 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죽음에 대한 명칭이 다른 것입니다. 알건 모르건 우리 한국사람들의 표현에도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면 보통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윗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개 어른이 돌아가셨다, 나보다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어야 마땅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괴롭히다가 죽으면 뭐라고 합니까 잘 뒈졌다고 합니다. 죽었다고 하지 않고 뒈졌다고 그럽니다. 자, 여러분은 어느 쪽이 될 것 같습니까 그런가하면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요새 와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소천했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죽음과 삶은 항상 곁에 있습니다. 서로 맞서 있습니다.
생명의 문제가 곧 죽음의 문제요, 죽음이 있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사람에게 명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17절).” 무슨 말씀입니까 살라고 생명을 내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생사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 때에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의 법에서 떠날 때에 죽음으로 간다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과 싸우며 살아갑니다.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는 중에도 얼마나 많은 죽음이 내 앞을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가는 것, 오는 것, 이 모든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삽니다. 어찌 생각하면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그 과정을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죽음을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죽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제일 마음이 아프고 듣기 괴로운 말이 있습니다. 임종이 가까운 사람을 방문합니다. 인간적으로는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아주 심각하게 중요한 말씀을 드립니다. ‘당신은 이제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말씀을 다 드리고 나면 맨 마지막 반응이 어떤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목사님, 이러한 시간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왜 욕심을 부렸겠습니까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고 마는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왜 미워했겠습니까 왜 쓸데없는 일을 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니 후회가 막급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있는 줄 알았으면 과거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다시 내게 생이 주어진다면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생을 살아볼 마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싶습니다. 오늘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그것 하나 몰랐다니 말이나 됩니까 인간이 죽는다는 일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몰랐습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미련한 사람입니다. 천치요 바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죽음을 남의 이야기로만 듣지 마십시다. 나는 그 시간에 과연 무슨 말을 하게 될 것입니까 이대로 죽어도 되는가 여기에서 끝내도 문제가 없는가 나의 생 전체를 죽음 앞에서 재평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죽음을 잊고 살려 합니다.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폭력을 씁니다.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리려고 일부러 역설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술과 마약, 폭력과 방탕으로 살아갑니다. 깊은 곳에 있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려고 하는 역작용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억지로 부인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로마사람들이나 헬라사람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 소위 지성인들은 만나면 서로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메멘토’는 ‘리멤버(remember)’라는 말이요 ‘모리’는 ‘죽음(to die)’이라는 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리멤버 투 다이(remember to die)’라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나도 당신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사십시다. 혹 부부싸움을 하십니까 둘 다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아마 휴전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더는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이대로 끝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이것이 인사였습니다. 아침인사요 저녁인사입니다. 죽음을 잊지 말고 살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 믿게 되자 이제 인사말이 바뀝니다. ‘마라나타(Maranatha)’성경에도 나오는 유명한 인사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번역이 됩니다마는 좀더 자세히 살피면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임을 기억하고 사십시다. 우리가 다 주님 앞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십시다’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로써 서로 유무 상통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순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오렌지카운티에 그 유명한 척 스미드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이름이 갈보리 채플(Calvary chapel) 입니다마는 교회에 직접 가보면 갈보리 채플 글자 옆에 괄호하고 ‘마라나타 커뮤니티 (Maranatha community)’라고 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아주 생명력 있는 교회입니다. ‘마라나타 커뮤니티’–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거기에 중심이 있고, 거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신앙 안에 사는 생명,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혹자는 어느 성경말씀대로 죽음을 의식하기에, 다시 말하여 내일 죽을 것이기에 오늘 먹고 마신다고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온 것을 의식하며 가장 신령한, 가장 경건한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를 지칭해서 종말론적 윤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확증하며 살아갑니다. 시인 괴테는 말하였습니다. ‘죽고 다시 사는 도리를 알기까지 나는 처량한 나그네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죽고 사는 이치를 깨닫기까지는 누구나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생명의 문제부터 해결하여야 합니다.
죽음을 알고 부활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부활신앙, 부활에 대한 열망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죽고, 예수 부활과 함께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증받고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부활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부활신앙이라는 그 분명한 틀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헬라어로 ‘카트 헤메란 아포트네스코’라는 이 말씀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의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매일 죽으면서 삽니다, 나는 매일 죽음에 노출되어 삽니다,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이 그러했습니다. 보장할 수 없는 나날입니다.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죽음을 무릅쓰고 삽니다. 핍박이 그렇고, 환난이 그렇고, 건강이 그렇습니다. 사실 날마다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삽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예수의 죽음을 날마다 수반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는다지혜의 근본입니다. 어제 죽었다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하여 오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그리스도인의 오늘의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수님의 죽음을 수반하여 그는 그 옛날 다메섹 도상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는 생을 마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마침내 순교로 그 생을 끝내고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그는 늘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자나깨나 그 시간을 마음에 그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것은 잠시 주님의 뜻과 경륜 속에 사는, 덤으로 사는, 은사로 사는 사명적인 생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옛사람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삶입니다. 옛 생각, 세상 것, 세상 욕심을 계속적으로 부정하고, 동시에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생을 계속적으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부정하고 새사람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완전히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계속적으로 확인하며 사는 것입니다. 확인, 확증하는 생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끔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비행기표를 바로 컨펌(confirm)하는 일을 합니다. 잘못해서 큰 실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늘 이 나라 저 나라 다닙니다마는 토요일에는 꼭 돌아와야 하는 사람이 제가 아닙니까 한번은 중국 타이베이에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여행사에 부탁을 해놓았는데 여행사 측에서 컨펌하는 것을 잊었던 모양입니다. 공항에 나가보니 컨펌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좌석을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좌석이 없는 것입니다. 비행기에 입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돌아오는 데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간신히 돌아온 일이 있어서 이후로는 컨펌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를 않습니다. 제가 꼭 확인을 합니다. 직접 전화를 걸어서 몇 시 몇 분에 내가 컨펌을 했다고, 잊지 말라고 다짐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는 티켓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컨펌이 되지를 않아서 문제가 됩니다. 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재확인해야 합니다. 시간 시간 확인을 하여야 합니다. 확증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다시 한번 확증을 하십시다. 옛사람이 깨끗이 죽었는가 새사람으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이 날이 끝난다면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 재확인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사랑의 확증을 받아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일리 다이(daily die)’라고 한 반면에 루터는 데일리 뱁티즘이라고 한 것입니다. 날마다 세례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으로 행하여 죽고 은혜로 살고, 나로 향해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죄로 죽고 의로 살고, 절망으로 죽고 소망으로 사는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세례 받는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죽어야 할 부분인데 죽지 못하였습니다. 죽여야 할 부분인데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못 끊고 있습니다. 끝내 끄나풀을 못 끊고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한,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한, 부득불 끊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끊도록 비상조치를 취하십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 가운데 가끔 쓰는 말이 있습니다. ‘저 사람 하나님 앞에 혼났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번씩 혼나고야 정신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겸손해야 될 사람인데 교만하고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립니다. 예수는 믿는데 뭔가 좀 부족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딱’ 치시면 꼼짝못하고,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본체를 향하여 다듬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수련 과정, 생명을 정확히 하는 그 역사는 그야말로 정확한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놀라게 하여 겸손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하십니다. 마침내 그렇게 되어 주님 앞에 불려 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나는 이길 힘이 없습니다마는 주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나는 끊을 힘이 없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기어이 끊게 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죽이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납니다. 죽음을 부득불 당하는 사람이 있고, 죽음을 깨닫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나를 죽여가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생명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I am crucified with christ”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생명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알기에 나를 죽이고, 생명을 믿기에 우리는 모든 고난을 무릅씁니다. 이 생명을 알기에 기뻐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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