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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크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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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제목 :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크릭 !] 성경 : 마태복음 21 : 1-11, 3.25(종려주일) 4 복음서에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기록이 25장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마지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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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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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주일설교 –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실 때도 보잘 것 없는 갈릴리 마을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 설교,김대영 목사,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3/31/19) 막11:1-10 ·세상의 왕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지만 이 땅에 진정한 왕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유는 그분이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3/31/19) 막11:1-10 ·세상의 왕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지만 이 땅에 진정한 왕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유는 그분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미 여러 차례 방문하셨지만 이번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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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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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나귀를 타신 예수님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과 사람이 일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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µÎ¶õ³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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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µÎ¶õ³ë 스가랴 9~14장은 구약에서 메시아 예언의 장으로 유명한데 그 가운데 9:9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실행하셨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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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데겔 설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 가스펠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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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이달의 데겔 설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 가스펠투데이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했는데, 이는 왕이 평화적인 의도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예수는 평화 속에서 입성했다는 것이다. …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이달의 데겔 설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 가스펠투데이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했는데, 이는 왕이 평화적인 의도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예수는 평화 속에서 입성했다는 것이다. 신학적 관점예수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라 계속 가는 중에 생긴 이 사건은 극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소개되어서 예수에 관한 전승 중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마가 고유의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예수는 왜 환호를 받으며 적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로 결정했나? 예수가 잔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고도 입성한 것은 그의 대적자들에 대한 도전이었나? 아니면 하나님의#데겔,#설교,#성서정과,#말씀의잔치,#교회력,#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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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겸손해서? – 드림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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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예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겸손해서? – 드림투게더 그런데 ‘예수님이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신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을 저도 갖고 있었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유교, … 종려주일, 거의 대부분의 교회나 많은 기독교인이 떠올리는 분문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입성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읽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익숙한 성경 읽기가 주는 아쉬운 대목입니다. 무엇이 아쉬운 점일까요? 먼저 성경 본문을 읽어봅니다.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 21:2-3)….”이르시되, “너희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나귀 새끼,매인 나귀,예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겸손해서?,예수의 마지막 한 주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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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 12장 12절-33절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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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 12장 12절-33절 : 네이버 블로그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요12:12-33. 어느 시대나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대단한 기대와 부푼 꿈을 가지게 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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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성경 : 마태복음 21 : 1-11, 3.25(종려주일)
4 복음서에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기록이 25장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동안 당하신 고난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은 오늘 본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많은 무리들은 겉옷과 종려나무가지를 길에 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실을 통해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나귀 주인은 알고 있었다 .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위해 두 제자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네게로 끌고 오라.”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 주인의 허락을 받아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4복음서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나귀 주인이 주님을 위해 어떻게 나귀를 선뜻 내어줄 수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나귀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짐을 실어 나르거나, 이동할 때 없어서 안 될 교통수단입니다. 또한 나귀는 한국 농촌에서 소가 살림 밑천이었던 것처럼 아주 소중한 자산을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아무 조건 없이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구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적용한다면 매일 승용차로 출퇴근하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차를 빌려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매일 출퇴근하는 차를 빌려달라고 할 때 선 듯 내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나귀 주인은 주님에게 나귀를 내어줌으로 불편은 물론,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는 사실입니다.
나귀가 묶여 있었던 동네는 “벳바게 맞은 편 마을”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이 바로 “베다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을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웃동네입니다.
베다니는 어떤 동네입니까 ? 주님이 나사로를 살린 곳이며,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 곳이며, 많은 병자들을 고친 곳입니다.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이란 뜻이지만, 베다니 동네사람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베다니 사람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베나니 사람들은 주님이 나귀를 사용하시겠다고 하였을 때, 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3절)“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주가 쓰시겠다.”란 “네 주인이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퀴리오스)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직접 “ 내가 주인이다 .”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 마태복음 16장,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마16:16)“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자가 되실 뿐 아니라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나니 사람들, 특히 나귀
주인은 자신의 인생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12:1)“너는 청년의 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내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 생명과 힘과 능력, 모두가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됨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무리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노르웨이 하콜 왕이 한 신하와 함께 마차를 타고 눈이 많은 오슬로 지방을 순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로 마차가 부서지면서 왕은 괜찮았지만, 신하는 크게 중상을 입어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은 신하를 마차에 태우고 왕이 마차를 끌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사진과 함께 왕이 사고를 당했지만, 신하가 왕을 무사히 구출했다.”라고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왕궁으로 돌아와 이 기사를 본 왕이 기자를 불러 “왜 사실대로 보도하지 않았느냐?” “왕과 신하를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하자 신하가 답변하길 “왕이 종의 행세를 하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만왕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나귀를 타고 종의 행세를 하므로 사람들이 몰랐던 것입니다. 나귀는 영어로 동키(donkey)라고 하며, 수컷은 잭(jack), 암컷은 제니(jenny)라고 부릅니다. 유럽에서 고집불통인 사람을 “당나귀(Donkey)같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작품 속에 나오는 돈키호테의 시종 산초가 탔던 것이 바로 나귀입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 무리들이 자신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이뿐 아니라 (10-11절)“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냐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이 출생하였을 때 “유대인의 왕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나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가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크게 흥분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드디어 우리 민족을 로마로부터 해방 시킬 메시야가 왔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를 정복하고 자기 민족을 해방하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장군이나 메시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로마를 정복할 수 있는 장군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실망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이유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일주일 만에 돌변하였습니다 . (눅23:18-21)“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무리들은 주님으로부터 떡을 얻어먹고, 병 고침을 받고, “호산나”하며 환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살인자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쳤습니다.
한국은 작년에 촛불집회를 통해 대통령을 탄핵하였습니다. “탄핵하라”, “구속하라” 그 결과 시민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시민들은 이제 태극기를 들고 또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군중심리와 민심은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거품처럼 올랐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이 군중입니다.
마태는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5절)“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주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시고 겸손하게 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 세상 정복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에 권세를 부리고 힘을 과시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남에게 군림하고, 큰소리치고, 약한 자를 무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겸손함입니다.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 스가랴가 말씀하시다 .
나귀는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교통수단입니다. 나귀는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많은 짐을 지고 산과 사막, 들판 어디서나 짐을 지고 갑니다. 이런 이유로 “나귀는 짐을 지는 동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을 나귀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 (5절)“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즉, 주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우리의 모든 짐을 지신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는(사53: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하셨습니다.
“담당”이란 “모든 짐을 지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지고 있는 모든 죄의 짐을 주님에게 지우셨다.”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짐입니다. 세상에서 죄만큼 무거운 짐이 없습니다 . 다윗은(시32:1-3)“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사람이 태어날 때 뼈는 약 350개 정도이며, 어른이 되면서 서로 붙어 200개정도 된다고 합니다. 뼈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피를 만드는 것과 인체에 필요한 영양분을 저장하는 역할입니다. 한마디로 “뼈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며 출발지”란 뜻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표현할 때 “뼈 속 깊이 사무치다” “뼈를 깎다.”“뼈 빠지게 일하다.” 사람이 감내 하기 힘든, 최고의 고통을 표현할 때 “뼈가 아프다.”라고 합니다. 다윗이 “뼈가 아프다.”는 것은 “생명의 뿌리가 아프다.”란 뜻입니다.
죄는 우리를 넘어지게 할 뿐 아니라, 인생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기쁨과 소망,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습니다. 죄를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의 짐을 져 주셨습니다.
주님이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의 왕과 같은 모습이 아닌,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 짐을 져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깊이 세기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3/31/19)
막11:1-10
·세상의 왕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지만 이 땅에 진정한 왕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유는 그분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미 여러 차례 방문하셨지만 이번은 당신을 따르던 무리들, 심지어는 유대교 지도자들 조차도 다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공공연하게 진행되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고, 그 나귀 마저도 빌린 것이었고, 안장도 없어서 제자들이 겉옷을 깔았다. 이것은 예수님이 500년 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다.(슥9:9)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안장처럼 올려놓기도 하고, 길가에 종려나무 가지를 깔아 놓기도 했다. 또한 ‘호산나’를 외쳤는데, 자신들의 눈앞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 그분이 유대 나라를 독립시켜서, 이전 다윗 왕 때의 영화를 찾아줄 수 있는 분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7-10절)
*‘종려나무’=‘승리’나 ‘번영’을 상징,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그분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셨다.(슥9:10) *나귀 새끼 = ‘겸손’과 ‘평화’를 상징
·‘화평’이란 예수 믿으면 마음 편해진다는 말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가 되었고, 그 결과 인간들은 죄악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보며 낙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함으로 사람들과의 다툼과 단절을 가져온다. 맞고 틀리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시켜주시기 위해 오셨다.(엡2:14,16)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과 지혜로 살게 해주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처한 상황을 이해할 때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보며 이해하게 되며 받아들이게 해준다. 결국 갈등과 다툼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셨고, 겸손을 통해 구원에 동참할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
·지상 최대의 겸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것도 로마 군병들의 가진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죽기 까지 낮아지신 것이다.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실 때도 보잘 것 없는 갈릴리 마을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데도 나귀 새끼를 타셨다.
·그러나 그분의 겸손은 최고의 반전을 이루었다.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수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이 일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겸손하게 죽으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겸손함으로 섬길 때 영혼 구원의 역사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 분 자신이 창조주이이셨지만,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통해서이다.(요13:14,15)
·진짜 겸손은 사람들 앞에서 겸양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 앞에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는 것이다.(벧전5:5,6)
·반대로 진짜 교만은 자신의 생각이 늘 옳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교만 가운데 있으면 결국은 패망한다.(잠16:18,19)
·또한 진짜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께서 함께 하시고 이루실 일이라면 뒤로 물러설 일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기에 못한다 소리 하지 않고, 반대로 내 지식과 내 경험가지고 말하지 않게 된다.(렘1:7,8)
3)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의 뜻에 합당하게 쓰여져야 함을 말씀하신다.
·주께서는 허락도 없이 쓰시겠다고 했고, 또 사람들은 그 말에 순종했다. 주께서 하시는 일들 앞에 거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 생각으로 하면 절대로 안될 것 같은 일도 되어지고, 또 어떻게 보면 무례하고 대책없는 일 같지만 그 일이 정말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물질 뿐 아니라, 은사도, 나의 시간도 심지어는 내 자식들도 내 것이 아니다. 주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들을 나에게 맡겨두신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청지기 의식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제자의 삶이다. 부하려 하면 시험과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서 곧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재물을 주시고 안주시고는 주께서 정하시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삶의 자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정말 그 일을 하는데, 돈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주께서 알아서 주신다.
·지금 이 시대에는 아직도 주의 은혜를 알지 못해서 어둠 속에서, 사망 가운데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 주께서는 그들을 향해 가라고 말씀하신다.
학습 및 적용 문제:
1)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이유를 슥9:9,10의 말씀을 통해 두가지로 설명해보라.
2) 진정 겸손은 어떤 것이며,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벧전5:5,6; 렘1:7,8)
3) 나는 진정으로 겸손한 자인지, 나의 물질에 대한 생각들은 어떤지 나누어보자.
[이달의 데겔 설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2021년 3월 28일 종려주일
마가복음 11장 1-11절
신학적 관점 예수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라 계속 가는 중에 생긴 이 사건은 극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소개되어서 예수에 관한 전승 중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마가 고유의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예수는 왜 환호를 받으며 적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로 결정했나? 예수가 잔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고도 입성한 것은 그의 대적자들에 대한 도전이었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 이외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에 의한 것이었나?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어떤 일이 생기든 상관없이, 예루살렘 입성은 장차 생길 일에 대한 징표였나? 한 주일 안에, 환호는 멸시와 조롱으로 바뀐다. 종려주일은 돌이킬 수 없이 성금요일로 변한다. 추앙받던 예수는 멸시의 대상이 된다. 예수의 고난을 오늘의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고난과 연결하지 않고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가 당한 멸시와, 멸시 속에서도 빛나는 진정한 존엄의 의미도, 오늘날 조롱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지 않고 깨달을 수 없다.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했는데, 이는 왕이 평화적인 의도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예수는 평화 속에서 입성했다는 것이다.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다. 예수는 그를 파괴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도리어 그들이 예수를 파괴하는 데 세력을 모으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금요일의 어두움이 종려주일의 광명을 변형시킨다. 즉 이 두 가지가 연결될 때만 우리는 존엄성은 온전함(integrity, 통합성, 통일성)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잘못된 심판과 의혹과, 공포와 폭력, 심지어 죽음의 위력은 객관적인 모습 그대로 먼저 파악된 후에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주석적 관점 “승리의 입성”(개선행진)이란 용어는 마가복음에 중요한 장면 전환을 가져오고 설화의 중심점이 되는 이 본문의 중요성을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나귀의 중요성을 무엇인가? 마을에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은(11:2) 놀랍다. 말 대신 나귀를 이용한 것은 마가의 독자들에게 영광과 전쟁보다(슥 9:9) 평범함과 겸손함을 보여주지만, 하지만 나귀가 일반적으로 타는 짐승인 것처럼 이는 우스꽝스럽거나 비천한 것은 아니다. 한 번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것은 의전용으로 딱 맞는 것이다( 민19:2; 신21:3 삼상 6:7에서 아직 멍에를 매어 본 일이 없는 짐승 참조). 예수는 그 짐승이 어디 있는지, 그의 제자들이 가져오려 할 때 무슨 질문을 받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등, 그가 예상하고 있는 일어날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모든 사건은 그의 목적이 예수와 완전히 일치를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다. 예수가 나귀를 타셨을 때, 많은 사람이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는데, 이는 주요한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는 순례자에게 하는 일반적 환영방식이었다(요한복음에서만 종려나무 가지로 특정하고 있다). 군중들은 소리 지르며 순례자들에게 구원의 주님으로 부르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시 118:26 이하 참조). 마가는 새로운 전체 시의 축하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걸어온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탔고, 군중들은 생나무만 깔아놓은 것이 아니라 겉옷 또한 길에다 폈다(왕에 대한 환영방식, 왕하 9:13 참고). 마가의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거나 과감하게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정체성을 애매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외쳤다. 그들이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는 외침은 예수를 다윗 왕조의 계승자로 환영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군중들이 시가지를 행진하며 환호하고 경의를 표하며 공개적으로 메시야 왕이 되어 달라고 청원한 것은 분명히 깃발을 들고 위기를 촉발하는 것이지만, 예수는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 이상한 “승리의 입성”의 반글라이맥스적인 대단원은 독자들에게 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나지 기다리며 보라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랑에 대한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인 관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지탱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 연관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종려 가지 사이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이상하게도 우리가 피상적인 사랑이라는 망상 쪽으로 향하지 않기 위해 싸우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예수에게는 피상적인 사랑이란 없다. 우리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공포를 견디는 사랑을 받는다. 이런 사랑은 종종 우리가 실제라고 착각하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려주일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오해하는지 보여준다. 우리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확장되어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실제 행동들로 측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나귀에 타고 종려나무 사이로 행진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런 행위는 위대한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다. 위대한 기독교 신비가 시몬느 베이유는 이렇게 썼다.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 줄 사람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관심을 줄 수 있는 능력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다. 그것은 기적이다.” 예수가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완전한 관심을 가지신다는 기적이다. 예수 안에서 세상은 자기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되고, 예수 안에서 이런 깨달음으로 우리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하나님과 씨름하던 존재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피조물로 변모한다.
설교적 관점 이번 주일은 설교자들에게 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려는 설교자들에게는 도전이 되는 주일이다. 교회에 있어서 고난주일 예전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입성을 약화시키거나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중대한 일이고 설교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때로 종려주일 예전을 위한 본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비록 그 본문이 분명히 보다 큰 고난이야기라는 상황에서 선포되어야 하면서도 말이다. 예루살렘 입성에 초점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그것은 이 이야기가 예수사역에 있어 가장 거칠고 또 격앙된 정치적 행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찬양이 지닌 정치적 특성뿐만 아니라 예수 사역에 담긴 정치적 갈등을 기억나게 한다. 이 사건은 단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귀여운 어린이들을 보며 어른들이 웃는 그저 예배를 시작하는 행진정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마가복음 11장 1-11절에서 예수는 세심하게 계획된 풍자적인 “군대행진”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감으로써 정치권력을 비웃는다.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권력”을 섬기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고 초대한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행사의 정신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중요한 정치적 의미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오늘 본문에서 단지 몇 구절만이 (8절-11a절)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본문 중 대부분은 (1절-7절) 이 사건을 위해 예수가 했던 계획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구절들은 예수가 이 모든 일을 미리 계획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새끼 나귀를 준비했고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보고 있는 군중들과 더불어 사용할 신호도 가르쳐주었다. 예수는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다. 그는 한편의 “길거리 공연”을 세심하게 연출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길거리 공연에서 예수는 왕을 패러디하는 풍자극을 연출한다. 그는 감람산에서 시작하는데 (1절), 그 산은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해방을 위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 장소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예수는 자신의 “마지막 행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것을 내보낼 때 좀 이상한 상황이 된다. 그가 선택한 것은 전쟁무기가 아니라 새끼 나귀 (마가복음에서는 완전히 자라지도 않은 당나귀)였다. 예수는 무장하지 않은 채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때, 그는 승리한 민족영웅을 위한 열병식 같은 이 행진을 받아들인다.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군중들은 승리한 군사지도자가 기대할만한 모든 행동을 한다. 제국의 입장에서 반역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하며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와 옷을 존경의 표시로 예수 앞에 펼친다. 그들은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만수무강 하소서”라고 찬양하며 외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환호하는 군중 속으로 새끼 나귀를 타고 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줄곧 제국의 권력과 통치가 어떤 것인지를 군중들에게 보여준다. 예수의 길거리 공연은 우스꽝스런 정치적인 풍자이다. 그의 “승리의 입성”에서 예수는 “기존질서”와 그 가식적인 화려함과 지배를 풍자하고 대안적인 지배방식을 제시한다. 새끼 나귀를 탄 예수의 발은 땅을 질질 끌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그런 지배를 거부하는 분으로 나아온다. 그는 힘센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연약하고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로 다가온다. 예수는 여기서 광대의 역할을 취하여 우스꽝스럽고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즉 다른 형태의 “다스림”으로 다가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 것을 요청한다. 예루살렘입성은 우스꽝스럽고 극적이며 또 정치적이다. 이 이야기를 신중하게 편성하여 현실풍자를 하는 길거리 공연으로 재현하는 일은, 예수의 행동이 체제전복적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의 길거리 공연은 풍자가 “기존질서”를 폭로하고 저항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설교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풍자와 축제형식을 통하여 복음과 기독교 예배가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설교자가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거행하는 종려주일 예배는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헌신과 제자도를 요청한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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