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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의 미련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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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전도 의 미련한 것으로 본문: 고린도전서 1:18-31, P.264 제목: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교회의 분쟁을 치유하는 근본 원리를 제시하는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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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의 미련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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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18-25)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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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18-25) : 네이버 블로그 그리고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그 말씀을 보려고 한다. 1. 십자가의 도는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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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 — 늘푸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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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전도의 미련한 것 — 늘푸른교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 얻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각해봅시다.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전도의 미련한 것 — 늘푸른교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 얻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각해봅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 얻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각해봅시다. 멸망하는
자, 곧 예수를 믿지않는 사람들의 보기에 예수는 단지 반역자로 죽었을 뿐입니다. 그런 예수를 믿는다고 어떻게 지은 죄가 없어지고 천국을
가겠습니까? 지금도 멸망하는 자들에겐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는 교인들이 바보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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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 — 늘푸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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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에 대한 오해!
전도는 미련한 방법이 좋다: 노방전도의 효용성?
▲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코닷 연구위원
전도하면 떠오르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얼마 전 필자가 강남역 근처를 걷다가 두 사람이 전도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사람은 마이크로 뭔가 소리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학원이나 기타 유흥업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판촉 행위를 할 때와 비슷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주는 것 같지 않았고 전도지를 받아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나라도 전도지를 받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분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전도자는 필자에게 전도지를 건네주지 않았다. 그는 기계적으로 사람들 앞에 전도지를 내밀었다가 거두는 동작을 하고 있었고 필자도 여느 사람처럼 전도지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전도지를 든 손을 내밀었다가 빨리 거두어 버린 것이다.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 전도자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도 않았고 다만 자신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에 빠져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가끔 큰소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분들을 본다. 지하철역이나 시장, 번화가에서 주변 사람들을 향해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당당하게 소리치는 사람들은 과연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인가? 노방전도의 효용성은 과연 있는가?
이렇게 전도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좀 미련한 방법이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들의 열정과 열심에 주눅이 들고 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저런 열심이 없는데……’ 더구나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는 ‘전도는 너무 고상하게 해서는 안 돼! 성경에도 전도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하라고 돼 있어.’라고 생각한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성경 구절 때문에 우리는 전도는 미련하고 무식하게 해도 된다는 생각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도의 미련한 것’에 대한 오해
정말 전도는 미련하게 해도 되는가? 고린도전서 1장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의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 원어를 살펴보면 그 답이 있다. 헬라어 본문을 살펴보면 한글 개역개정 성경과는 사뭇 다른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우리 성경에서 ‘전도’라고 번역한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일단 ‘전도’는 ‘도를 전하다’의 명사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지를 나눠주거나 복음을 들려주는 것 혹은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 책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 등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사용한 단어 ‘케리그마’(kerygma)는 ‘설교’ 혹은 ‘선포’라는 단어이다. 즉 ‘케리그마’는 전도 방법 중 하나인 설교나 선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설교라는 방법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설교’와 ‘선포’가 미련한 방법이라고 하셨다. 왜 미련한 방법일까? 이 표현은 설교의 방법이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는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도를 전할 때 여러 방법을 동원해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한다. 일방적으로 선포하거나 설교하는 방법으로는 감동도 없고 설득도 쉽지 않다. 이 방법은 미련해 보이는 방법이고 그래서 교회는 도를 전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다. 사람이 보기에 지혜로운 방법 말이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설득시키고 이해시키기 위해 교회는 시대마다 다른 효과 있어 보이는 여러 방법들을 고안했고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교회는 그런 방법을 찾고 있고 이런 방법을 알려주는 수많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인지 선택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 설교의 본 뜻!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을 잘 읽어보면 ‘설교’와 ‘선포’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알 수 있다. 단지 우리와 교회가 그 방법을 신뢰하지 않을 뿐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사도들에게 맡기셨다. 사도들은 그 진리의 말씀을 잘 보존해 교회의 직분자에게 맡겼다.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 이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를 구원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셨나? 그것은 ‘설교’의 미련한 방법이었다.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설교하네!’ 혹은 ‘설교하지 마!’라는 말은 ‘설교’라는 단어 속에 얼마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담겨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또 이 말 속에는 말하는 사람이 손수 실천하지 않고 말만 앞세운다는 뜻도 들어 있을 것이다. 목사 자신도 이런 표현의 영향을 받아 ‘설교’가 일방적인 ‘선포’가 되지 않도록 애를 많이 쓴다. 설교 가운데 청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성경 본문을 함께 읽기도 하고,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연극을 하기도 한다. ‘설교’ 곧 ‘선포’라는 일방적인 방식으로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설교가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의 종인 목사를 통해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개념이 없어진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부터인가 목사도 교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은혜 받은 것을 나눈다는 의미가 강조되어 왔던 것 같다. 그것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설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는 사라진다. 설교를 통해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QT 쉐어링(sharing) 정도로 격하시켰음을 보게 된다. 설교자 스스로가 말씀을 선포한다는 영적인 자신감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설교(선포)의 미련한 방법’을 주셨다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장 23-25절을 보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게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여기서 ‘전하는 것’은 바로 ‘설교(선포)’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설교가 경홀히 여김을 받는 때도 없을 것이다.
설교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는 수많은 전도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전도 프로그램 주창자들이 하는 공통된 말이 있다. 그것은 ‘설교로는 안 된다’이다. 어떤 전도 방법의 효용성과 유용성을 강조한 나머지 설교를 통한 전도를 평가절하한 말이다. 서울의 유력한 한 교회의 목사님도 어떤 프로그램을 몇 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해 소위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그가 가르친 것이 바로 ‘설교로는 안 된다’였다.
이런 주장들이 호소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있다.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 곧 십자가에 점철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강단에서 정확하게 선포되지 않고 온갖 세상 신변잡기들로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설교가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부담은 설교를 하나님의 뜻(사랑과 공의)의 선포가 아니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설교가 시원찮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설교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길 기뻐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고 사람들이 고안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교회 교인의 숫자가 증가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은 설교와 선포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회복해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좋은 전도의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설교’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가장 오래 애용되었고, 지금도 통하는 방법이며, 주님 오실 때까지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교회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쇠퇴해 갈 때 취해야 할 방법은 무엇인가? 교회의 무능력과 침체의 문제는 참된 복음 설교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할 일은 외부사람을 끌어 들이기 위해 ‘전도 특공대’를 조직하는 것보다 말씀을 선포하고 선포된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 우선이다. 교회가 바르게 회복될 때 가장 왕성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나 부흥기의 교회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설교)를 듣고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각성할 때 부흥이 일어났다. 바울이 초대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해야 했다. 그리고 성도는 그 복음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바울은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바울이 강조한 것은 교회가 교회답게 바로 서고 성도가 성도답게 바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 기초가 없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만 전하려고 하는 전도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기독교 혹은 교회라는 세력을 넓히는 데는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소금이 맛을 잃어 밟히고 있는 상황에서 회개하는 것이다. 전도지를 들고 나가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이 없는 전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오히려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교회는 우선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선포해야 한다.
성례를 회복해야!
하나님의 복음, 곧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방법은 성례를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 있다. 이 두 가지는 교회에서 제사 드리는 것 같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이 시간은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이다. 성례를 행함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성례는 우리가 만든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정해 주신 방법이다. 우리는 이 성례를 행함으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성찬에 대해 바울이 가르친 말씀을 보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성찬을 행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자가 성찬에 참여하며 복음을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듣는다. 불신자는 성찬을 보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복음을 보고 듣는다.
교회는 의식으로 전락해 버린 성례를 회복해야 한다. 성례는 빨리 끝내 버려야 할 부담스런 행사가 아니다. 성례는 우리의 아이디어를 동원해 멋지고 그럴 듯하게 기획해 지겹지 않게 만들어야 할 잔치도 아니다. 성례는 예수님이 정해 주신 것이기에 언약의 하나님과 그 사역을 잘 드러내도록 시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에 머물러 버린다면 핵심인 복음은 선포되지 못할 것이다.
권징을 회복해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권면과 징계라는 방법(마 16:19; 18:17-18; 고후2:6-8)도 주셨다. 오늘날 교회에 권(면)징(계)이 사라지면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권징은 하나님의 사랑의 매로서 죄를 범해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권징은 권징을 집행하는 자나 권징을 당하는 자나 피차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신 방법이다.
또 한편 권징은 교회의 성도가 죄를 범해 누룩처럼 거룩한 교회에 누룩처럼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의미도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것도 권징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 성도들이 사회에서 죄를 범해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럽힘을 당하게 되니 복음 선포를 통한 영혼구원에는 나쁜 영향이 있음을 당연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런 마당에 권징을 행하기란 쉽지 않다. 하나님의 방법이 교회를 부흥시키기는커녕 어렵게 만들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은 인간보다 지혜롭다. 믿음으로 권징을 잘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살 길이며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나가며
복음 전도는 ‘사람의 일’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이 하는 전도이지만,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자칫 인본주의적 사고방식과 방법론이 지배하면서 이 부분이 헷갈린다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당신의 방법을 사용해 부르신다. 그 방법으로 교회의 ‘설교’와 ‘성례’와 ‘권징’이 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설교’가 미련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선포하신다. 신자는 그 말씀을 받아 성숙해 가며 불신자는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어 거듭난다.
고전1;21 전도의 미련한 것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주로 전도의 방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사영리(CCC)나 브릿지(네비게이토), 어린이 전도, 노인 전도 등 맞춤 방식으로 전도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이와 같은 전도의 방법에 적용해서 생각합니다. 전도의 방식이 조금 투박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지혜’와 ‘미련한 것’을 대조합니다. 고린도 지역은 수사학이 발달했고, 사람들은 철학과 관련된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세상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저주받은 것이고(신 21:23, 갈 3:13), 헬라인에게는 정치범이나 노예를 죽이는 수단이었습니다.
(산돌교회 포스팅 https://blog.naver.com/sandolchurch245/221676602092 )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은 저주를 받은 사람이거나 정치범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헬라의 철학이 발달한 고린도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는데, 하나님의 지혜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세상의 지혜를 기준으로 분파를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전도(케리그마)’란 우리가 전도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방식, 즉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한 ‘십자가’라는 방식이 미련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헬라) 사람들이 미련하게 생각하는 십자가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미련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세상의 지혜는 무력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고, 미련하다고 생각해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의 큰 문맥은 분쟁인데, 세상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기준으로 서로를 구별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가 진하게 베어져 있습니다. 복음 안에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하나로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도 세상의 기준으로 서로를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며,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 > 설교자료실
전도의 미련한 것고린도전서 1장 18~25절석기현 목사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맥아더 장군이 저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참모회의를 모아 놓고 그 작전을 건의하자, 그 자리의 모든 참모들이 하나같이 펄쩍 뛰며 반대를 했습니다. 그처럼 간만의 차가 심하고 갯펄이 넓은 해안으로 대규모의 상륙 작전을 펼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반대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맥아더는 말하기를 “귀관들은 모두가 다 세계 최고 수준의 참모들이다. 그런 귀관들이 이 작전을 도무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면, 적군들은 더더욱 설마 이런 곳으로 우리가 상륙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작전은 반드시 성공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절대다수의 상식을 깨뜨리는 한 사람의 천재적인 착상이 그 작전을 큰 성공으로 이끌고 갔던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기독교가 땅끝까지 전파되어 가는 이 복음 전선에 있어서 바로 그처럼 비범한 신적 지혜를 발휘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깨뜨릴 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의 총명까지 철두철미하게 압도하는 최고의 작전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부터 21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그 작전이란 바로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복음을 전함으로써 기독교를 땅끝까지 확장시킨다는 것은, 세상의 ‘선비’나 ‘변사’들이 보기에는 정말 ‘미련한’, 도무지 통할 것 같지 않은 무리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작전은 사도 바울 시대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혼을 사단에게서 구출하여 구원받게 만드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절묘한 구령 작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우리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은 과연 어떻게 이 작전을 수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까?1. 전도자는 전도 대상자들이 기독교를 통하여 오직 인간적 욕구 충족만을 기대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복음 전파에 온 생애를 바친 사도 바울은 그가 전도할 때마다 절실히 체험한 한 가지 공통적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바울 자신으로부터 복음 아닌 다른 것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기록된 말씀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여기 ‘구하다’라는 말과 ‘찾다’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즉 유대인이고 헬라인이고 간에 이들이 바울을 통하여 받고자 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표적’ 보여 주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믿기에 앞서 뭔가를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뭔가 그들을 감탄시킬만한 이적, 혹은 자기네들에게 당장 실제적 유익을 주는 권능 즉 신유 따위의 기적을 행사해 줄 것을 바울에게 요구했습니다. 전도자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유대인의 버릇은 이미 예수님께서도 자주 경험하셨던 일이었습니다. 사복음서 여러 곳에, 유대인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여 주기를 예수님께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어떤 ‘지혜’로운 것을 바울에게서 원했습니다. 이들은 믿기에 앞서 뭔가를 ‘머리 속으로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도가 어떤 합리적인 사상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들과 비교해 볼만한, 혹은 그것들을 능가할만한 새로운 논리적 지식을 바울을 통해서 듣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아덴(아테네)에 전도하러 갔을 때 이런 일을 경험했음이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모든 아덴 사람들은, 일은 노예가 하고 있으니까, 날이면 날마다 아레오바고라는 집회 장소에 모여서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았다」(행 17:2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오직 세상 지혜일 뿐이었습니다. 단지 복음만을 전하기 위하여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던 사도 바울에게서, 이처럼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들대로, 헬라인은 헬라인들대로 그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울이 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예나 지금이나 우리 기독 전도자들이 만나게 되는 전도 대상들은 이처럼 복음 아닌 다른 것, 전혀 엉뚱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들인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갖가지 필요나 욕구를 목사나 교회가 충족시켜 줄 수 있으면 신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불치의 병이 나아야 하고, 벼락부자가 되어야 하며, 세상 만사가 다 자기 뜻대로 되어 나가야 마땅하다고 기대하면서 나아옵니다. 이들은 목사가 자기의 영적 문제뿐 아니라 온갖 자질구레한 육신적 문제들까지 해결해 줄 수 있는 팔방미인 같은 사람이 되어 주기를 원하면서 교회에 출석합니다. 교회는 종교적 집단이면서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적 제 문제들에 관여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 학문에 약간 닦인 지식인들은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상반되는 요소들을 성경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기독교의 교리를 소위 합리적인 사고 방식에 맞도록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기독신자들 앞에 있는 전도의 대상은 이처럼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참 전도하기 쉽겠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오직 자기네들의 욕구와 지식을 만족시켜 주기만을 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전도해야할 사람들인 것입니다.2. 전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선포하는 이 한 가지 전도 방법만을 고수해야 합니다.사람들이 기독교를 향하여 요구하는 바가 그러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전도해야 합니까? 온갖 현실적 필요, 지적 충족만을 원하는 그들에게 과연 복음 전도자는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그 대답은 단 하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 무엇을 구하든지 찾든지 간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마땅히 선포되어야만 할 전도의 주제, 복음의 핵심을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누가 무엇을 바라든지 간에 그의 전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22절과 23절 사이에 ‘그러나’에 해당되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우리 한글 개역 성경에는 이 단어를 직접 옮겨 놓고 있지는 않지만 그대신 22절의 마지막 동사의 어미를 ‘찾으나’라고 번역함으로써 ‘그러나’라는 말의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과 헬라인은 이러저러한 것들을 원하는 줄은 알지만, 우리는 그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라는 뜻입니다. 또 이 귀절의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는 소위 강조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에서 쓰이는 특별한 문장 구조인데 우리나라말로 굳이 직역하자면 ‘우리’라는 단어가 두번 반복되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장을 ‘우리,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라고 하면 자연스러운 번역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뉘앙스를 정확하게 우리 말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두 단어를 통하여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나 뚜렷합니다. 새로 번역된 성경에 보면 그와 같은 바울의 강조점을 반영하기 위해서, 23절의 마지막 동사 ‘전하다’라는 말을 ‘전할 따름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도할 따름이지 다른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라는 의미를 잘 전달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무엇을 찾든지 무엇을 요구하든지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겠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우직한, 그러나 너무나도 멋진 고집이었던 것입니다.사실 바울은 그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란 것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가서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며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세주라는 존재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거리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하로부터 그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군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었다는 요한복음 6장 15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기대했던 예수님께서 오히려 로마 군병의 손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들의 태산 같던 기대는 깨어졌습니다. 승리하는 군주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하던 유대인들의 눈에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고통당하는, 낮아지신 종으로서의 메시아란 도무지 공감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감만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는, 즉 ‘거치는 반석’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한편 이방인 즉 헬라인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바보 같은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야만인 취급하던 유대인 중의 한 사람, 그것도 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노예나 흉악범을 처형할 때 쓰던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죄수에게서, 그들이 자랑하던 고고한 학문에 비길만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말은 그들의 합리적 사고 방식으로 따져 볼 때 백번 어처구니 없는 미련한 소리일 뿐이었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사도행전 17장을 계속 보면, 바울이 아덴 사람에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증거하자마자 그들은 바울을 ‘기롱했다’고 32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처럼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단지 세상 사람들이 받을 준비가 안된 정도가 아니라, 훨씬 거센 거부 반응을 유발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세찬 반발과 조롱을 던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주제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 복음, 외곬으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전도자는 바로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야 무슨 기대나 요구를 가지고 나아오든지 간에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고집불통이 되어야 합니다. 제나름대로 요구 사항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재미가 없고 딱딱해 보이고 혹은 ‘케케묵은 옛날의 어리석은 이야기’라는 조소를 받더라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내 죄와 당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이 한 가지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내 죄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지금까지 예수 안 믿고도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 왔다.’라고 마음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 구시대의 신화 같은 복음은 오늘날 과학문명 시대에는 보다 이치에 맞는 새로운 신학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소위 지혜롭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조소를 던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꼿꼿하게 그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도해야할 따름입니다.3. 전도자는, 택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어 있다는 확신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그처럼 무리해 보이는 전도가 과연 어떤 결과를 낳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정말 놀랍고도 은혜로운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증거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22절과 23절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주제를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변형시키거나 양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음을 보았습니다. 그저 우직하고 무식해 보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고집스럽게 전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그 복음을 들은 자들 중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 미련해 보이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신기한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헬라인들이 원하는 바들을 전혀 묵살하면서 오히려 그들이 거리껴 하고 조소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는데도, 정말 듣는 자의 요구와 전하는 자의 복음은 극도로 상반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보아도 전도의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 즉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이미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택하신 자들의 심령에는 그 복음이 파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 딱딱해 보이는, 그 재미없어 보이는, 그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그 무식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리스도 십자가’가 적어도 택자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으로 받아 들여진다는 사실은 실로 오묘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그뿐 아니라, 일단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은혜를 체험하게 된 자들은, 이전에 잘못 구하고 있던 것들까지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표적만을 구하던 유대인들이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자, 그들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생애가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 아니 최고의 기적적인 사건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혜만을 찾던 헬라인들 역시 그들이 갈구하던 세상 철학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완전한 지혜의 근본을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일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나 색깔을 사람들의 요구에 맞게 바꾸었더라면 결코 그런 멋진 결과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전하는 대신, 가는 곳마다 그저 병이나 고쳐 주고 혹은 자기의 학문을 총동원하여 재미있는 수사만을 구사했더라면, 그의 전도는 택자의 영혼 구원에는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런 타협을 거부하고 전혀 고집스럽게 바보처럼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선포하자, 도무지 복음을 받을 것처럼 보이지 않던 자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택함을 이미 입고 있던 자들이 그 복음에 전적으로 감동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개인적 육신적 소원들까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충족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너무나도 멋진 전도의 완벽한 결과가 아니었겠습니까?세상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도무지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 중에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택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전도자의 희망입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을 기대하던 사람들도 일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외의 모든 부수적인 필요나 욕구는 예수님 안에서 틀림없이 해결된다는 것이야말로 전도자의 확신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에 맞도록 우리의 전하는 복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대로, 그저 꾸준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면, 전혀 인간이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결과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22절부터 24절까지 나타나는 이 모든 과정을 온통 계획하고 주장하고 계시는, 그야말로 한 손에 꽉 잡고 계시는 분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5절 말씀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재차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딴에는 머리를 짜내고 안간힘을 쓰면서 온갖 변칙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았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워 놓으신 그 오묘한 작전에는 도무지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저 높으신,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기쁘시게 정해 놓으신 방법을 따라 그 분이 시키시는대로 복음을 전파하기만 하면, 그 마지막 열매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맺혀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성도님 여러분,왜 오늘날 일부 목사들은 스스로 팔방미인이 되려 합니까? 왜 오늘날의 일부 교회들은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들에 비위를 맞추어 주기에 급급합니까? 사람들이 음악회장에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함입니다. 클래식 음악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이 어쩌다 초대권 하나 얻어 들어와 앉아 있다 하더라도, 연주자들은 그 사람 하나야 알아 듣든지 말든지 전혀 개의치 않고 원래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클래식 음악만을 연주합니다. 사람들이 왜 야구장에 갑니까? 프로 선수들의 박진감 넘치는 야구를 구경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다 야구보다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친구따라 와서 지루하게 앉아 있다 하더라도 야구 선수들이 그 사람 기분 맞추어 준다고 야구공으로 축구를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집단들과 전문인들도 각각 분명한 그 주된 기능과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몸되신 이 교회이겠습니까? 하물며 그 교회의 지체된 우리 전도자들이겠습니까? 교회의 기능은 사회가 무엇을 요구해 오던지 간에 상관치 않고 오직 복음만을 선포할 뿐인 것이며, 기독신자의 사명 역시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든지 간에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만을 전도할 따름인 것입니다.저는 이 말씀과 함께, 노아의 생애를 기억해 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잘 살아가고 있을 때 혼자 미친 사람처럼 산꼭대기로 배를 지으러 올라가던 노아를 그려 보았습니다. 그 평온한 시대에, 문명은 발달하고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서 건강한 장부들을 낳으며 번영을 누리던 그 태평성세에,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물심판을 외치면서 배를 짓는다고, 그것도 바다도 아닌 산꼭대기로, 매일 같이 올라가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한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정말 어리석은, 실로 미련한 행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정말 옛날 영화 제목에 나왔던대로 ‘바보들의 행진’입니다. 정말 틀림없는 바보들이지요. 매일같이 산꼭대기로 배를 지으러 올라가는 사람들, 그것도 얼마 안 있으면 온 세상이 홍수로 다 잠길 것이라는 이상한 소리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정말 더 이상 어떻게 바보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저와 여러분 역시 이 시대로부터 조롱받는 오늘의 노아입니다. 노아와 꼭같은 바보들인 것입니다. 아니 그런 바보들이라고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 위해 대신 죽으셨던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 노아 때에는 물심판이 있었지만 이번에 재림하시면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 십자가 공로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다.’라는 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이런 비합리적인, 이런 미련한, 이런 정신나간 소리를, 찬란한 과학 문명과 지성을 자랑하는 이 현대 사회를 향하여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오늘도 산꼭대기에 교회라는 구원의 방주를 짓고 있는 바보들이라고 자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십자가의 도’는 ‘멸망받을 자’에게만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지, ‘구원을 얻을’ 택자에게는 하나님의 최고 지혜요 최고 능력이며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는 명작전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스스로 간직하고, 오직 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의 택자를 불러 모으는 진정 지혜로운 전도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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