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은 흔히 비유장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한 장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어려울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쉬울 수 있다. 적어도 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외식하는 자와 같은 가치관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이 말씀이 비유라고 하시고 또 그것을 풀어주셨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비유장을 보면서 이 비유장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누가 봐도 비유인 말씀을 하신 것만을 비유로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34-35)
즉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액면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의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볼 줄 아는 가치관과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내라고 했다고 자신의 한 달 간의 수익을 앉아서 계산하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시는지를 아는 안목이 먼저라는 것이다.(그렇다고 십일조를 하는 이유를 또 액면 그대로 보물을 쌓을 곳이 없게 하겠다는 것이 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 처음 나오는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이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떨기에,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진다는 비유이다. 그렇게 되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예수님의 설명에 있어 핵심은 있는 자는 받아서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가진 것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천국의 비밀에 대하여.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목적과 본질을 아는 자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천국의 비밀조차 다 빼앗길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풀어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씨 뿌리는 비유가, 비유의 내용 안에 있는 길가에 떨어진 씨나 돌밭에 떨어진 씨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보면 또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떨어진 각각의 씨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씨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씨>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다른 것을 뿌리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도 사람이고, 예수님도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사람에 대한 것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렇게 사람의 본질에 대하여, 사람이 존재 목적과,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만드신 목적과 정체성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씨의 정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것이 비유이든 아니든 다 사람에 관한 하나님의 의와 뜻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된 본체이신 것이다. 그것이 또 창세부터 감추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비유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예수님의 화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가 바로 비유라는 것이다. 비로 이것을 알면 어떤 말씀이든지 들으면 들을수록 더 풍성해지고, 그 안목이 없으면 그나마 가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도 다 빼앗기듯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내용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을 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바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삶 전체가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였다는 것이다.
비유라는 것이 직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솝우화처럼 그냥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그 안에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도 비유다. 누가 홍길동전을 읽고 반정부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유가 표현된 표현과 비유로 전하고자 하는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차이인 것이다. 그것을 구분하는 안목이 없으면 홍길동전을 읽고서 알고 있는 내용마저 다 헛것이 되지만, 홍길동전이든 표현된 것 이면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안목이 있으면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어떤 말씀은 정말로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행동으로 지켜내려 하고, 어떤 것은 의미만 새기려 한다. 십일조는 1원짜리 하나 틀리지 않으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미만 새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을 지키는 것을 다르게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하다. 정해진 것이 없다. 시대 반영과 같은 엉뚱한 설교를 듣기도 했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구분의 기준은 없다. 다만 자기의 생각과 자신의 이익 그 뿐이다. 십일조 하는 것은 재물적인 축복을 기대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손해를 보는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그렇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기 안에 선과 악을 구분하듯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 내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의 삶이 의미하는 본질을 몰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온전히 안다면 성경 구절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언제나 일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안다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고, 어느 하나 모른다면 다 모르는 것이다. 고양이가 바다에 빠졌다고 고래가 되겠는가? 생명의 말씀을 안다면, 어느 구절, 어떤 말씀도 그 의미하는 바를 다 아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그런 말을 하는 목사는 정말로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어디 영원하신 말씀을 가지고 그런 망발을.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은 그 표현된 것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본질이 내용으로 있기에 다 비유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과 말씀은 어떤 것이 표현된 것이고 그 어떤 것, 곧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씨다. 또 비유다. 씨는 작지만 큰 나무의 모든 생명이 들어있고, 비유는 씨 안에 생명이 들어있듯 그 표현된 것 안에 본질이 들어 있어 비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만 말씀하신다고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삶과 말씀으로 표현하신 본질적인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인데, 히브리말로 <메시아>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문제, 스스로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여 빚진 죄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모든 것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의 본질이고, 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며, 사람에게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모든 사람에게 회복되어야 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대로 그 성품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의 본질이고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본질을 아는 사람이 바로 더 풍성해질 수 있는 가진 자의 가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고자 하신 것이 그것을 보고 듣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으로 회복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씨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풍성해지기에 가진 자는 더 풍성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와 같이 그 표현 안에 들어 있는 진정한 본질을 알지 못하면 그나마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것 마저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목수의 아들이 죄인과 놀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형식만 보고서 예수님을 죽였다. 즉 비유의 표현만 보고 무엇을 이야기하시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혈통적인 자부심과 재산을 끝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본질을 깨달은 이들에게 다 빼앗긴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못 박은 그 유대인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질은 잊고, 그 표현 자체에 매몰되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처럼 형식만 보고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이 아는 하나님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듯 그 마저 다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대화나 수사법에 대한 묘미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또 유대인들을 비꼬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은 삶 자체가 비유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자는 더 풍성하게 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나마 가진 신앙마저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