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품꾼은 천국 일꾼을 의미합니다. 포도원에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았던 것처럼 하나님나라에서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일꾼을 부르듯이 하나님께서도 천국 확장을 위해 일꾼을 부르십니다. 이 비유에서 아침 일찍부터 나와 일한 일꾼들은 일찍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릴 때 부름 받아 세상의 때에 물들지 않고 일평생 주님을 섬긴 사람들은 참으로 신실한 일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강조하는 것은 비록 늦게 부름을 받아 헌신한 일꾼들도 하나님은 귀히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보면 아침 6시부터 나와 일한 일꾼, 9시, 12시, 3시에 나와 일한 일꾼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이 거의 끝날 즈음에 와서 일한 일꾼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똑 같이 임금을 주었습니다. 주인은 왜 임금을 똑 같이 주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찍 부름 받은 사람이나 늦게 부름 받은 사람이나 동일하게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일평생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한 일꾼들이나, 늦게 부름 받은 일꾼일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봉사와 헌신 역시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로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보다 나중에 시작한 한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는 하나님나라에서 비록 작은 역할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에 귀하게 이바지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찍 부름을 받았든 늦게 부름을 받았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서 내가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꾼은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꾼은 단 한 시간만 일했습니다. 그럼에도 주인이 똑 같은 품삯을 나눠 주었습니다. 이런 집 주인의 행위는 우리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의 질과 양을 통해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일에 근거해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비록 나의 가진 재능이 부족할지라도, 나의 힘이 부족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바칠 때 하나님은 이를 귀하게 보십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뒤늦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늦게 부름을 받았을지라도 주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의 나의 헌신을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일찍 부름을 받았느냐, 일찍 부름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 부름 받은 사람이나 늦게 부름 받은 사람이나 모두 귀하게 보십니다. 문제는 부름 받은 후 지금 주님께 충성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주는 또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고용된 일꾼들이 불평을 했을 때 주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했습니다. 사실 집 주인은 일찍 온 일꾼들에게 처음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기 때문에 불공평하게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들의 불평에도 그들을 친구로 부르며 관대하게 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베드로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행위에 근거해 주님께 공평한 처분을 요구하지만, 우리 역시 곧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이렇게 넘어졌을 때도 우리에게 관대하십니다. “친구여, 너는 내가 나중 온 사람들에게 관대했다고 불평했지? 하지만 너도 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임을 잊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에 시달리며,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이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은 나를 행위로 대하시지 않고 자비로 대하십니다. 그 자비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회개의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의 소원을 갖게 됩니다. 주님은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나를 향하여 “친구여” 라고 부르십니다. 그 자비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희망을 갖게 되고,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최세창 목사 / 1977년 감리교목사안수, 한국성서신학교 출강, 인천여신 출강, 협성대 출강, 훼이스신학대학원객원교수, *28년간의 1250여 주석대조연구로 신약 전권인 『최세창의 신약주석 시리즈』출판 *논문* “바울의 인간이해” “야고보서의 저자에 관한연구”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문제” “고용주와 고용인의 도리” “부부간의 도리” “부자간의 도리” “기도에 관한 성서적 개요” “서원기도에 관한 연구” “칭의에 관한 연구” “바울의 성 이해” “주석과 설교에 관한 소고” “히브리서의 저자 연구” 외 교계 잡지 연재 및 세미나 인도 다수
주를 좇는 자의 보상을 설명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마태는, 그것과 관련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마태의 독특한 기사로 19:30의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다.
이 기사는 【1】“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로 시작된다. 원문의 첫 부분에는 가르(γάρ)가 있어서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천국”은 3:2의 주석을 보라.
“포도원”①과 관련해서 반즈(A. Barnes)는 “유대의 상당 부분이 포도의 문화에 젖어 있었다. 그러므로 기름지고 잘 경작된 장소를 가리키는 데 종종 포도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가꾸시는 포도원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는 해뜨는 시간을 의미한다.“작업 시간은 태양이 비칠 때부터 별이 뜰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랍비 문헌들에서 읽을 수 있으며, 시편 104:22, 23에서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E. Schweizer).
“집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집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간 이유는 “큰 도시에는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오전 6시경에 모이곤 하기 때문이었다”(Eric F. Bishop).②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이 품꾼들을 만나서 한 약속에 대해, 예수님은 【2】“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라고 하셨다.
“한 데나리온”(δηναρίου)은 로마의 은화인데 품꾼의 하루 품삯, 또는 군인의 하루 급료에 해당되었다(10:29의 주석과 18:2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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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을 밝혔음.
1) 포도원(사 5:1, 3, 4, 5, 7, 27:2, 렘 12:10-)과 포도나무(시 80:8-19, 사 5:2, 6, 렘 2:21, 19:10, 겔 15:2-, 17:6-, 19:10-, 호 10:1)는 이스라엘로 비유되었다. 이러한 구절들은 이스라엘은 순수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민족이라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여 멸망의 위기를 초래한 민족이라는 점을 서술하고 있다.
2) Eric F. Bishop, Jesus of Palestine(London: Lutter worth, 1955), 203, in R. Earle, 마태복음(비콘 성경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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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쳐(E. Schweizer)는 “정식 절차가 분명히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정확하게 행해졌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의 집주인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3】“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라고 하셨다.
“유대의 날은 해가 뜨는 오전 6시부터 시작됐고, 그 시간들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산되었는데, 오후 6시는 공식적으로 다음 날이 시작된 시간이었다”(W. Barclay). 그러므로 “제 삼 시”는 오전 9시경에 해당되는 것이다.
“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여러 가지 상품을 팔고 사는 장소이다. 얼레(R. Earle)는 “장터(agora)는 중앙의 집회소인데 각 도시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 어린아이들이 놀기도 하고(11:16),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도 하며(agorazo는 사다), 법관들이 재판하기도 하고(행 16:19), 철학가들은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행 17:17).”③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일자리를 구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는 일하기 싫어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감을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은 【4】“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로 뒷받침된다.
그 집주인은 그들에게 특정한 품삯을 약속하는 대신에 “상당하게 주리라”, 즉 일한 만큼 보수를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약속을 들은 그들은 그 포도원으로 갔다.
그 후의 집주인의 같은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5】“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라고 하셨다.
“제 육 시”는 정오쯤을 가리키고, “제 구 시”는 오후 3시경을 가리킨다.
집주인은 더 이상 같은 행동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때에도 같은 행동을 하였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6】“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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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 Earle, 마태복음(비콘 성경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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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십일 시”는 오후 5시경을 가리킨다. 이 시간에 고용되면,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품꾼들이 그 날은 공치는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집주인은 그런 그들에게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물었고, 그들은 “품꾼으로 써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품삯을 정하지 않은 채, “포도원에 들어가라”라고 하였다. 이 품꾼들은 먼저 고용된 품꾼들보다 더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일하는 시간이 끝나고 품삯을 지불할 때가 되었을 때에 집주인이 한 일에 대해, 예수님은 【8】“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라고 하셨다.
“저물매”는 오후 6시경을 가리킨다.
‘Red Vineyards at Arles’ (1888) by Vincent Van Gogh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의 “청지기”는 에피트로포(ἐπιτρόπῳ)이며 ‘관리인’, ‘청지기’(마 20:8), ‘장관’, ‘집사’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집주인이자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모든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라고 하였다. 집주인의 지시는 품삯을 당일에 지불하라고 하는 신명기 24:15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때는 최후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J. A. Bengel).
그런데 맨 나중에 온 품꾼들에게 지불된 품삯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9】“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이라고 하셨다.
“제 십일 시” 곧 오후 5시경에 와서 한 시간 정도만 일한 품꾼들이 와서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의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을 것이다. 집주인은 한 시간 정도만 일한 품꾼들에게 일한 분량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에 사랑을 베풀어 준 것이다. 이 처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 것을 본, 먼저 온 품꾼들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은 【10】“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라고 하셨다.
제 삼 시(오전 9시경)에 온 품꾼들과 제 육 시(12시경)에 온 품꾼들과 제 구 시(오후 3시경)에 온 품꾼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먼저 온 자들, 즉 이른 아침(오전 6시경)에 온 자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한 약속을 알고 있었지만, 훨씬 적게 일한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 받는 것을 보고는 그들보다 “더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한 데나리온씩 받은, 먼저 온 자들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11】“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하셨다.
“원망하여”는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인 에공귀존(ἐγόγγυζον)이며 ‘원망하다’, ‘불평하다’, ‘투덜대다’ 등을 의미한다.
포도원에 먼저 와서 약 열두 시간 동안 힘들게 일하면서 더위를 견딘 품꾼들이 원망한 이유는,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 정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먼저 온 품꾼들의 시기와 불평 또는 원망이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약속된 한 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처럼 가난한 품꾼들이 일이 없어 괴로운 마음으로 놀고 있을 때, 그것도 공치는 날로 여길 수밖에 없는 십일 시경(오후 5시경)에 그 품꾼들을 고용해 주고, 게다가 1 시간 정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하루 품삯인 한 데니리온을 준 집주인에 대해 감사한 마음과 존경심을 가졌어야 했다. 실상, 집주인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의로웠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었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13】“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셨다.
집주인은 부당하게 투덜대며 원망하는 그 품꾼들 중의 한 사람을 “친구”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은 계약한 대로 이행했기 때문에 그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하나님께서는 약속 이행은 물론, 사랑으로 역사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더욱 나쁜 것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부당한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J. A. Bengel). 실상, 더 많은 시간을 일한 것이 더 많은 대우를 받을 필연적 조건은 아니다.
계속된 집주인의 말에 대해, 예수님은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라고 하셨다.
집주인은 그 품꾼에게 정당한 그의 몫인 약속된 품삯이나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나중에 온 품꾼들에게 그와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고 하였다.
집주인은 더욱 강조하여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하였다.
주인이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할 권한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가난한 품꾼들을 사랑한 선한 주인을 악하게 보느냐는 것이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정당한 주장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인간과 만물의 창조주인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로 자신의 뜻대로 하시는 일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구원과 믿는 사람들의 보상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의 결론적 말씀에 대해, 마태는 【16】“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19:30의 주석을 보라.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524-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