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다”(요4:24) – 어떻게 예배한다는 것인가?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한복음 4장의 몇 구절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많은 교회의 주보 예배순서에 적혀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주 이 구절을 인용하여 “예배는 이렇게 드려야 하는거야”라는 식으로 말하기 위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떻게 예배한다는 뜻입니까? 실제로 이 말을 많이 쓰고는 있지만,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막연하게 많은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을 “소위 영적으로(신령과),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진정으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글성경이 그렇게 보이도록 번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이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예배 드릴 때 영적으로(사실 이 영적인 예배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예배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만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 땅에 원어를 한 번 들춰보지도 않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많아 모를 뿐이지,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우리네 교회 행태의 중요한 부분을 반성할 수 있는 요소도 들어 있습니다.
원문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라는 말은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떼이아”입니다. ‘엔’은 영어의 ‘in’ 에 해당하는 전치사이고, ‘프뉴마티’ 와 ‘알레떼이아’는 각각 ‘성령’ 과 ‘진리’ 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출현빈도가 낮은 단어가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에서 ‘영’, ‘성령’ 등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프뉴마’입니다. 단어 자체에 대한 상세한 뜻을 주해하지 않더라도, 그냥 단순하게 말해도 이 단어는 ‘성령’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알레떼이아’ 역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서 보편적으로 성경에서 ‘진리’라고 할 때 거의 ‘알레떼이아’를 씁니다. 두 단어 모두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처음 배울 때 배우는, 즉 초급단어들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무언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잘 살리면서, 그리고 전치사까지 살리면서 번역을 하면 이 말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가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할 때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표현 안에 소위 말하는 “영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이 있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신령과’라는 말을 어떤 신비적인 느낌으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령과’를 이해했을 때, 그 사람의 예배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체험을 찾으려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성경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단지 “성령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예배는 어떤 공중에 떠다니는, 혹은 마음 속에서 영적인 어떤 기운이 흘러나오게 되는 그런 종류의 예배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성경에서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은 이런 신비적 체험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 안에 “진심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 역시 있습니까? 한글 번역의 “진정으로” 라는 말은 오역입니다. 이 말씀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이 단어는 “진리 안에서”라는 의미이지, “진심으로”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이해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기존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다”라고 말할 때는 주로, “예배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신다”고 하면, 무언가 좀 더 영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무언가 더 진심어린 태도로 예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본래 의미는 “예배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배의 속성”, “예배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령과 진리라는 말은 한 전치사 아래 묶어져 있기 때문에 두 단어는 같은 것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용례와 성경 전체의 어법에 의하면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요한의 용례에서 ‘진리’는 ‘그림자’, ‘모형’의 반댓말입니다). 글이 복잡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본 글에서는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에만 주목해서 글을 전개해 보도록 합시다(“진리 안에서” 부분은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으면 해 보겠습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은 사실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표현입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한 번도 하나님께서 “자!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라고 보여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즉 모델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인지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신령한 예배’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어떤 신비적 체험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관하여 두 가지 정도 중요한 유추를 해낼 수가 있습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의미를 명확히 경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유추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말씀이 씌어져 있는 방식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23절과 24절에서 두 번 연이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24절 곧 우리가 이 글에서 제목으로 삼은 절에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의 예배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예배하는 자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할 근거를 어디에서 두셨는고 하면,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에 두었습니다. 헬라어 단어로도 두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프뉴마 호 떼오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엔 프뉴마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에 두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영이시니까 너희도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의미는 대단히 명확해 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은 “육체가 아니시다”, “인생이 아니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 안에서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영이시므로 너희도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좇는 육체적 방편들로는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는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내용은 무언가 신비적인 차원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인간이 원하는, 인간이 좋아하는, 인간의 방편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와 달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칼빈 역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주해하면서 이런 식으로 썼습니다.
“인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의 성품에 맞는 것에 탐닉하는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피상적인 의식으로 가득찬 것을 여러 가지 발상해 낸다. 우리는 물이 불과 상종하지 않는 것처럼 육신과 도저히 통할 수 없는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음을 우선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지루해 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방탕함을 억제하는 데 족할 것이다” (칼빈 주석 중, 요한복음)
칼빈은 이 요한복음의 구절을 “로마 가톨릭 예배와 완전히 상충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의 예배야말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라기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육체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찬” 눈에 보이는 것을 만족케하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마 교회는 이 말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나쁜 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적용되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오히려 중세의 교회보다 지금의 교회들이 이것에 더욱 더 대담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없는 예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대담하게 도입합니다. 그리고 그 도입이라는 것이 대부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흥미를 가질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유익해하는 예배가 될지…..온톤 이것에 관심이 쏠려 끊임없이 예배에 새로운 것들을 장착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확하게 “성령 안에서” 혹은 “하나님이 영이시므로 영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선배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정확하게 이 사실에 대해 정립해 두었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가견적인 구상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에 따르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1장 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예배를 위해 “무언가를 고안해 내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오로지 “성경에 규정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배의 앞부분에 함부로 찬양집회를 끼워 넣고, 설교 앞에 꽁트나 스킷 드라마를 끼워 넣고, 연말에는 예배를 촛불을 켜놓고 온갖 잡다한 예식을 하는 행사로 만들거나, 심지어는 예배 시간과 간증시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예배시간에 패션쇼를 하기도 하고, 예배시간에 사람들의 장이 되어 서로 인사를 하거나, 특송이라는 명목 하에 노래자랑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사람들을 위한 순서들”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을 행하기 전에 적어도 대부분 교회들의 신조로 되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조항 한번 뒤적여 보지 않았을까요? 왜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는지 검토 한번 해보지 않았을까요? 철저하게 현금의 한국교회들은 단지 “실용적”입니다. 효과가 있으면 무엇이라도 합니다.
그러면 끝으로,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에 관하여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이 그 속에 계신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해 봅시다. 즉 불신자는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면 반드시 성령 안에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예배라는 것이 “신자에게만” 가능한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 안에 불신자가 많을수록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 누구든지, 교회의 예배에 불신자를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드리려고 할 때, 교회로부터 제제를 받는 교회에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예배는 어디로 갔습니까? 불신자가 함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들어오는 것은 주님의 이 말씀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관하여 전혀 아무런 선이해가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교회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 독립개신교단에 속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을 때 이런 권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예배를 집례하는 분으로부터 이런 제제를 받았습니다.
“손님으로 오신 분들은 본 교회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대우를 처음 받아본 저는 몹시 놀랐지만, 곧 이들이 예배에 대해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교회 뿐 아니라, 유럽과 아메리카, 호주의 개혁교회들은 이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단지 한국교회들과 세계의 현재 대중화된 추세가 그것을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하기보다,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교회의 분위기를 가만히 보십시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들(소위 부흥한다는 교회들은 더 그렇습니다)은 온통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습니까? 얼굴이 낯선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모든 촉각이 그리로 곤두섭니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어떤 새 사람이 들어와 교인수를 늘려줄지에만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예배 안에 불신자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아예 개념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신자들을 아무런 제제 없이 그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게 한 예는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자인 사람과 아닌 사람에 대한 선이 매우 엄격했고, 정확한 신앙고백을 거치지 않으면 신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아무런 규제가 없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서 주님의 명령을 매 주일마다 어기고 있습니다. 수많은 “성령 없는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함께 몰려와 “주님의 몸이 아닌데도 같은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듯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그렇게 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대안은 필요할 것입니다. 전도 받은 사람들은 예배외의 전도집회 등에서 따로 모여 신자가 될지 여부를 결정케 하거나, 아니면 예배 안에 들어올지라도 예배당 안에 손님석이나 관람석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예배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성도된 자들이 지키려 할 때에만 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예배의 중요성보다는 교회에 새사람이 오는 것만을 더 중시하는 풍조에서는 예배의 정체성 자체가 고수될 수 없습니다. 실로 예배드리는 자리 안에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끼어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의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들에 조금만 더 민감하다면, 말씀의 의미가 풍성하게 살아있는 산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인가 – 요한복음 4장 24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 – 김창선/성산효도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오늘날 예배 드릴 때 거의 습관적으로 인용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하고 겸손하며 진실된 마음 자세, 한마디로 예배 드리는 사람이 예배에 임하는 내적인 마음 상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마음 자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이러한 ‘영적’ 이해는 비단 현재 우리 교계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교회 안에서도 만연해 있다. 물론 이러한 정성어린 자세는 예배에 임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갖춰야 할 것임에는 두말 할 나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마음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인용하는 요한복음 4장 24절 말씀이 본래 그러한 뜻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요한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표현만큼 오래도록 본래의 의미에서 왜곡되게 사용된 성경 말씀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Ⅰ. 내적인 혹은 영적인 하나님 섬김(?)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대체로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난 표현을 인간의 내적인 마음 상태 혹은 인간 마음의 영적 상태와 관련시켜 해석해왔다(spiritualistisches Verst ndnis).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한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에 젖은 서구인들의 이해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헬라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 특별히 고대 헬라 신비주의와 스토아 사상 혹은 영지주의의 이해에 따르면, 이른바 유치한 원시종교의 외적이며 육적인 예배 이해와 대립된 것으로, 영적이고 신비적인 예배를 참된 예배로 간주하였다.1온전한 예배란, 제물을 바치는 제의적인 예배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비와 선행과 정의를 실천하는 진실된 마음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이미 구약성경 여러 구절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 1장 11~17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 (개역개정판).2 또한 헬라 유대 종교철학가로 통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von Alexandria, 대략 BC 20~AD 50년경)에게서도 그런 표상을 찾을 수 있다: “유일무이한 제물로서 진리를 바치는 마음의 섬김은 진실되다”(det. 21), 혹은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마음의 경건성을 떠나 진실되며 신성한 제물이 있단 말인가?”(Vita Mos. II, 108).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언급하는 예배가 바로 이와 같은 구약/유대적인 물질주의적인 예배 표상에 대립된 영적인 예배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영적 예배(곧 우리의 인간적 정성과 종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오랫동안 이해해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계몽주의 이래로 더욱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긴 세월 동안 내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이해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한글 ‘개역성경’도 그와 같은 영향을 받아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진정’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를 번역한 것인데, 인간 마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한다. 또한 ‘으로’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전치사 ‘엔’(en)을 우리말로 바꾼 것인데, 수단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배하는 자가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즉 ‘개역성경’에 나타나는 번역은 예배를 완전히 내적인 의미로 이해한 번역임을 알 수 있다.3 ‘공동번역’(1997/1999년)에는 그리스어 원어 ‘프뉴마’와 ‘알레테이아’가 전치사 ‘엔’과 합하여 완전히 부사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로 번역했다. 이로써 소위 ‘영적 의미’를 더욱 강조하여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요한복음 4장 20절을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인간적인 경건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과 관련이 있다. 한편, 요한복음 4장 24절을 내적 혹은 영적인 의미의 예배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서구 학자들의 주석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다. 한 좋은 예가 고데의 요한복음 주석에 나타난다. 고데는 요한복음 4장 23~24절과 관련하여 ‘영성’(Geistigkeit)과 ‘진정’(Wahrheit)을 미래에 있을 예배의 두 가지 특징으로 규정하면서,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기서 영은 인간적인 영혼(=정신)의 최고의 활동(die hochste Lebenstatigkeit der menschlichen Seele)을 가리킨다. 이로써 영혼은 신적인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된다. 곧 경건의 장소요,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며, 진실된 예배가 이루어지는 성소이다. … 이와 같은 첫 번째 특징은 새로운 예배의 내적인 세력을 묘사한다. – 두 번째 특징인 진정은 첫 번째를 보충한다. 영혼의 내적 성소에서 거행되는 예배야말로 유일한 참된 예배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대상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 영혼 가운데 또한 진정 가운데라는 이 두 표현은 단지 양태(die Art und Weise)와 관련된 것이다.”4 또한 하이트뮐러(W. Heitmuller)는 이렇게 해석했다: “영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혹은 민족과 제의의 경계를 넘어서 특정 지역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인, 따라서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다.”5 혹은 바우어(W. Bauer)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신성한 시간과 장소와 제의와 결부된 육(Sarx)의 영역에 속한 모든 멍에에 구속됨이 없이 ‘진실된’ 기도자(wahrhaftige Anbeter)는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할(geistige Gottesverehrung) 것이다.”6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이 모든 영적 혹은 내적인 해석은 본래 요한이 의도했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Ⅱ. 요한의 사고에 따른 이해 요한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4장 1~26절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나누는 대화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대화가 평범한 대화가 아님을 요한은 처음부터 강조한다. 한 유대인 남성과 한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 4장 24절의 문맥 이해어느날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옛날부터 유래한 한 우물이 있었는데, 행로에 지친 예수께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제6시(=정오)가 되자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그곳에 왔고, 마실 물을 청하는 예수님과 대화가 벌어지게 된다. 이 여인이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들은 오늘날의 시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로서 이방인과의 혼혈족이고,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던 사람들이었다. 9절에 예수께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이래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정통 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물을 청하자, 그 여인은 어찌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올리는 가운데, 우선적으로 메시아 계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누군인줄 알았더면 (역으로) 네가 나에게 생수를 구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여자는 물 길을 그릇도 없이 도대체 ‘생수’(=샘솟고, 흐르는 물)를 어디서 얻겠는가 하고 11절에서 상당히 이성적인 질문을 한다. 아마도 여인은 예수께서 다른 우물을 알고 있지 않나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러한 종류의 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물임을 설명한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라고 우회적으로 말함으로써,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자기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점을 표현한다. 그러나 여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갈증을 해소시키는 마법의 물과도 같은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4절)을 달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자 16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각도로 대화를 돌린다. 갑자기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꿰뚫고 있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엿보게 된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남편 다섯을 두었다는) 여자의 과거사를 정확히 밝히게 되고(18절), 그러자 비로소 여인은 예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서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고백한다(19절). 이어서 여인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참된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를 언급한다(성전을 예루살렘에 갖고 있는 유대인과 달리,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성소를 그리심 산에 세웠다). 21절에서 예수는 여인에게 대답한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함으로써, 두 장소와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예배 드릴 때가 지금 이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온전히 예배 드릴 때’란, 바로 예수와 함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수와 함께하는 현재에는 예배를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2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를 또한 그런 예배를 드릴 때가 언제인가를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참된 예배가 바로 지금 자신과 더불어 성취되고 있음을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때’란 바로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께서 오신 때, 바로 지금을 가리킨다. ‘이때’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는 문장의 맨 앞에 놓여 강조되고 있다. 이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인 24절 말씀을 예수께서 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설명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선포할 메시아를 기다린다(25절). 그러자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계시한다(26절). 2. 요한이 의미하는 ‘영’과 ‘진리’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타나는 두 핵심어인 ‘영’과 ‘진리’를 요한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은 이 두 개념을 인간의 심성과 관련된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하였다. 즉 영이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며,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요한의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각각의 개념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요한의 ‘영’(pneuma) 이해 요한복음의 ‘프뉴마’(pneuma)는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혼’(psyche)/‘마음’(nous)/‘몸’(soma)과 대립된 인간학적인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요한은 프뉴마를 인간적인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7 요한복음 3장 6절(“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에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세력으로 이해되는 ‘영’(pneuma)과 대립된 개념은 세상 세력을 대표하는 ‘육’(sarx)이다. 요한의 문맥에서 ‘신령’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되며,따라서 제자들을 계시의 진리 가운데로 이끈다. 이와 같이 이해된 하나님의 영은, 보이지도 않으며 단지 그 활동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을 뿐이기에(요 3:8), 인간의 접근이 근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요 1:18). 이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이 바로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요1 1:5)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8)라는 표현 역시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요한적인 이원론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은, 인간에게 어둠이 아니라 빛을 비추신다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요한의 영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말로 ‘보혜사’ 혹은 ‘협조자’로 번역하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빠뜨릴 수 없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복음(요 14:16f, 26; 15:26f; 16:7b~11, 13~15)과 요한일서 2장 1절에만 나타난다. 종교사적인 유래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은 이 개념은, 그리스어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특별히 법정에서 변호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불러들인 자’를 뜻한다.8 즉 누군가를 돕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의 문맥에서 이 개념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된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파라클레토스는 단지 예수께서 제자들과 이별한 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선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6절은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다. ‘가르치며’(cf. 요1 2:27)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이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26~27절은 파라클레토스의 또다른 기능으로서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기능에 대해 말한다. 게다가 파라클레토스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믿지 않는 세상을 고소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요 16:8~11).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6장 13~15절에 언급된 파라클레토스는 신앙 공동체의 활동과 관련하여, 예수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 가운데로 제자들을 인도하는 기능에 대하여 언급한다. 2) 요한의 ‘진리’ 이해 요한은 ‘진리’(aletheia)라는 개념을 자기 특유의 신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이 단어를 공관복음서 기자와 달리 훨씬 자주 사용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9 이 개념을 중요하게 간주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요한이 어떠한 의미로 이 개념을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이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된 언어 사용법에10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의 사용법이 눈에 띈다11첫째, ‘진리’는 다음과 같은 동사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진리를 ‘알다’ 혹은 ‘보다’(요 8:32; 1요 2:21); 진리를 ‘말하다’(요 8:40, 45, 46; 16:7); 진리를 ‘증거하다’(요 5:33; 18:37); 진리를 ‘행하다’(요 3:21; 1요 1:6); 진리에서 ‘나오다’(요18:37; 1요 3:19). 여기에서 요한이 뜻하는 ‘진리’는 계시를 나타내는 언어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둘째, ‘진리’가 전치사 엔(en)과 함께 사용된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 4:23, 24); 진리 ‘안에’ 서다/서지 못하다(요 8:44);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다(요 17:17, 19); 행함과 진리 ‘가운데’(1요 3:8). 여기에서 ‘진리’는 전치사 엔(en)과 더불어 일종의 부사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지 않고,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진리의 영역은 이와 대립된 영역을 전제한다. 이를 요한은 ‘어둠’(요 1:5) 혹은 ‘세상’(요 1:10)으로 부른다. 예배란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따라서 참 예배는 말씀의 온전한 선포를 전제한다. 셋째, 진리가 마치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은혜와 진리가 나타나다(요 1:17);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나는 진리다(요 14:6). 여기에선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은혜와 진리’라는 한 쌍의 명사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본래 구약적인 표현 ‘헤세드’(dsj)과 ‘에메트’(tma)에 상응한다.12 하나님의 자비와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출 34:6) 요한은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파송한 것을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이해했다. 아들 파송 사건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를 뜻한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진리’와 동일하다(요 17:17). 결국, 본질적인 의미로 볼 때, 요한의 ‘진리’가 뜻하는 것은 아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점은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경우의 언어 사용법 가운데 특히 잘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요한에게 나타나는 ‘영’과 ‘진리’란 서로 보충하는 개념으로서, 한마디로 세상적인 것 혹은 인간적인 것과 대립된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과 진리가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 이 표현은 요한 특유의 성령을 가리키는 칭호 ‘진리의 영’(요 14:17; 15:26; 16:13)을 연상시킨다. 또한 ‘진리의 영’은 다음과 같은 표현, ‘참 빛’(요 1:9; 1요 2:9), 혹은 ‘참 떡’(요 6:32) 또는 ‘참포도나무’(요 15:1), 또는 ‘선한 목자’(요 10:11, 14)와도 상응한다.3. 참된 예배란 이제 다시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구절 요한복음 4장 24절로 돌아가서, 요한이 의미하는 참된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참된 예배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특정 예배 시간과 장소의 극복참된 예배란 특정한 예배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참된 예배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은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오직 그리심 산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는데(요 4:20), 요한은 그것을 참된 예배의 본질로 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유대 전통적으로 내려온 제의적 관습을 거부한다. 예배의 본질은 제의 자체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해는 요한 특유의 사고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구약성서 및 유대 전통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현재에 가능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참된 예배란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고 강조하듯이, 하나님의 영과 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진리)가 드러난 현재,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순간에 가능한 것이다. 곧 예배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지금의 순간을 가리킨다(요 3:19; 5:25). 예배의 ‘참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된 순간에 제한되고 있다. 바로 그때 구원의 시대에 합당한 장소가 펼쳐진다. 참된 하나님 경외는 제의적 형식을 통해 인간이 주도가 되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예배를 특정 시간과 공간에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가속화된 예배의 형식화를 거부한다. 3) 현재 종말론적인 예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현재에 완성된 것으로 보는 현재적 종말론은 요한복음의 특징에 속한다(요 3:19; 5:25; 4:23; cf. 12:31; 16:11). 예수의 오심은 바로 종말론적인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선재한 로고스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미래 종말에 있을 사건이 바로 지금 실현되고 있다고 요한은 믿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말(요 4:23)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함께하신다는 근거에서 가능한 말이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종말의 시간이 기다려야 할 미래에 나타날 것이 아니고, 예수의 운명 가운데 바로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말이다.13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현재성은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가운데 참된 예배가 종말론적인 현재에 가능하다고 요한은 강조한다. 4)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배 요한은 그리스적인 사고보다 훨씬 더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였다. 요한에게 있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적인 것을 초월한 분이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하나님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정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의 차원에서 묘사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에 비로소 그분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란 이처럼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요한복음 3장 23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는 진술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즉 예배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삶을 이루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로운 은혜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도우심으로 가능해진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에 있어 하나님의 역사가 전제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락해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고 단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Ⅲ. 나가면서오늘날 우리는 예배의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에 너무도 집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하나님은 예배시 교회 건물 안에만 임재하고 계신 듯이 말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을 통하여, 참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주로서 바로 지금 우리와 더불어 역사하고 계신다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임을 살펴보았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피조물이라는 차원에서, 성과 속(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과 모든 날을 성스럽게 여기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속되다고 천대받던 창녀, 세리, 어린아이들과도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주일과 평일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날을 마치 주일처럼 귀한 날로 여기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은 바로 성스러운 주일과 다름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평일에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의 삶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산 예배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배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나의 주로 고백하는 믿음 가운데,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그러한 삶이 나의 노력에 달려있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두 무릎을 꿇는 삶인14 것이다. 참된 예배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체험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의 전적인 자비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부지런히 다양한 예배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 드러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요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값진 선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