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26 시편 41 편 강해 The 193 Detailed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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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시편41편_그러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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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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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강해

시편 41편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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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9(토) “시편 41:1-13”/ 작성: 김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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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9(토) “시편 41:1-13”/ 작성: 김대인
2018/06/09(토) “시편 41:1-13”/ 작성: 김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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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 성경주석 – BIB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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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 성경주석 본문

시편 41편 & 성경주석 - BIB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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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본문 및 주석 정리, 질병과 원수들 속에서 구원을 간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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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본문 및 주석 정리, 질병과 원수들 속에서 구원을 간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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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의 아멘(시 41편) – 유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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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의 아멘(시 41편) - 유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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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시편 41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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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시편 41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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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시편41:1-13절)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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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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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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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1편 강해

[개 요] 주제-“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이 머리말은 앞에서도 흔히 등장한 것이며, 우리에게 이 시편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비천한 가수에게는 이 노래를 맡기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기자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한다. 그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예언적인 노래를 지었으며, 따라서 이 노래에서는 다윗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이 소개된다. 다윗은 얼마나 폭넓은 경험을 하였던가! 그에게 비통스러웠던 일들이 신실한 이후 세대들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향기의 원천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 이 시편의 큰 주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점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분은 다윗의 원형이시며, 그분의 모든 백성은 나름대로 그분을 닮아야 한다. 따라서 위대한 대표자에게 적절한 말씀은 그분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잘 적용될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 오래도록 자비를 베풀고 파렴치한 대우를 받는 자들은, 이 노래를 읽고서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뛰어난 신앙인들도 거룩한 관용을 베풀고서 오히려 잔혹한 경멸을 당하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죄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겸비해질 때, 그들은 낮아짐을 통해 유익을 얻게 된다. 그들은 선행이 잊혀지고 가장 비열한 악의가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3절 시편 기자는,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은총들을 묘사하며, 이를 자기 자신의 개인적 구조 요청을 위한 서두로 사용하고 있다. 4절-9절그는 자신의 경우를 진술하며, 10절간구드리고, 11-13절감사로써 마감한다. [강 해] 1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2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 시편은 축복으로 시작되는 찬송들 중 세번째이며, 앞의 두 편들보다 더 진전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일이 맨 먼저 나오고, 죄사함이 두번째로 나오며, 이제 죄사함받은 죄인이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유용한 결실을 하나님 앞에 맺고 있다. 여기 사용된 단어는 앞의 두 경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강조적이며, 이에 따르는 축복들 역시 강조되어 있다. 본절의 “빈약한 자”란, 재물에 있어 궁핍하고, 육체적 건강에 있어 연약하며, 명성에 있어 경멸당하며, 또한 영적으로 낙심한 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대체로 기피 대상이며 종종 멸시를 당한다. 세상의 격언도 몰인정한 자를 가장 비난한다. 병들고 슬픈 자들은 가련하며, 세상은 마치 아말렉인이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아랑곳하지 않았듯이 그들을 저버린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총에 참예하는 자들은 보다 너그러운 성품을 지니며, 자신의 혈육에 대해 완악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짓밟힘당하는 자들을 변호하며, 그 가련한 자들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은 가련한 자들에게 동전 한 닢을 던져 주고는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슬픔을 소상히 알아 보며,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자세히 조사하고, 그들을 구해낼 최선의 방도를 연구하며, 또한 그들을 구출하는 일에 실제로 뛰어든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표시를 분명히 지니고 있으며, 마치 그 이마에 소인이 찍히기라도 한 듯이 그들은 여호와의 초장에서 노니는 양들임에 분명하다. 그들은 수년 전에 가련한 자들을 권고한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오래전의 케케묵은 선행을 자랑하는 것은 현재의 인색함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궁핍한 자들을 그 누구보다 긍휼히 여기사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처지를 기억하사, 자신은 부요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궁핍해지셨다. 그분의 모든 관심사는 우리를 이끌어올리시는 일에 집중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처지를 헤아리시고 충만한 지혜로써 놀라운 은총을 베풀기 위해 오셨다. 바로 그 은총에 의해 우리는 파멸로부터 구속함을 받는다. 불행한 광경이 그분의 연민을 자극했고, 곤궁함이 그분의 자비심을 움직였으며, 또한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세심한 배려와 지혜로우신 행동에 대해서는 성도들이 아무리 찬양을 드려도 부족하다.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빈약한 자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은 다른 이들을 생각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을 권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측정 도구로써 우리를 판단하신다. 가장 관대한 자들에게도 곤경의 날이 닥친다.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놓였던 다른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자들은, 가장 지혜롭게 궂은 날을 준비한 셈이다. 확실한 약속인즉, 관대한 성도에게 아무런 곤경도 닥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가운데서도 보존되며 또한 정해진 때가 이르면 건지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경우는 이 사실이 참으로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그분보다 더 심한 곤경을 당하거나 더 위대한 승리를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사신 자들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신다. 궁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일에 있어서 그들 모두는 그분을 닮아야 한다. 자선금을 내놓기 아까워하는 자들은 엄청난 축복을 놓치는 셈이다. 선행의 기쁨, 다른 이의 행복에 대해 흡족하게 여기는 마음, 비록 가진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에 천상의 미소를 늘 간직하는 일 등은 인색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기심은 그 자체 속에 저주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마음속에 자리잡은 암이다. 반면에 관대함은 행복이며 뼈를 살지게 한다. 암울한 날에 우리가 자선의 미덕에 의지할 수는 없지만,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고 죄수들과 병든 자들을 도와주었던 기억은 우리에게 적잖은 위안을 준다. 2절.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그의 고귀한 삶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죽을 운명에 처한 이생의 삶마저도 여호와의 권능에 의해 보호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이를 때까지 이 땅에서 살아가셨고, 간교한 헤롯의 계략도 정해진 시점이 다가올 때까지는 그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해진 때가 이르렀어도, 그분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넘겨 주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못했다. 주님을 닮아가는 모든 이들의 운명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복을 베풀고 또한 복을 받을 것이며, 보호하고 또한 보호를 받을 것이며,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삶을 배려하고 또한 그들 자신은 여호와의 보시기에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수전노는 돼지와 같아서 죽기 전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런즉 죽도록 내버려두라. 의인은 황소와 같아서 살아 있는 동안 일을 한다. 그런즉 그를 살리자.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그에게는 형통함이 함께한다. 그의 기름 항아리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궁핍한 선지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옷을 잘라도 오히려 그것이 더 길어짐을 보게 될 것이다.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자기 것을 포기할수록 그는 더 많이 소유했다. 그가 설령 일시적인 이득을 얻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영적 유익은 갑절이나 얻을 것이다. 그의 적은 소유가 복을 받고, 한 조각 떡과 물이 그에게는 잔치 음식이 될 것이다. 관대한 자는 이 땅에서도 복을 받으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미래의 몫뿐만 아니라 현재의 몫까지 갖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이 마음속에 기쁨으로 간직한 행복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그것이 모든 관대한 성도들의 갈망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축복일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그는 낙심한 자를 도왔으며, 이제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실 것이다. 만일 의인의 대적들이 그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면, 그들이 그에게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핍박자들의 연민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독사 구덩이에 빠지는 편이 더 낫다. 이 문장은 우리 주 예수님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 그분은 축복에서 제외되신 적이 허다하며 심지어 우리를 위해 저주를 당하셨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혹은 영원히 버림받으신 것은 아니다. 정해진 때가 이르렀을 때, 그분은 모든 대적들 위에 높이 들리셨다. 3절.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다정한 손과 부드러운 베개가 병든 몸을 받쳐 주듯이, 여호와의 영원하신 팔이 그의 영혼을 받쳐 주실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 얼마나 다정하며 또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병약함을 외면치 아니하시고 너무도 가까이서 보살피신다. 주피터가, 인도나 중국의 신들이 이렇게 하였던가? 이 구절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만 독특하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그분은 의인들을 간호하고 보살필 계획을 세우신다. 그분은 한 손으로 치실지라도 다른 한 손으로는 붙드신다. 여호와의 품안에서 실신했다면 그것마저 복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 품으로 받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최선의 회복제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만성적인 환자를 위한 가장 소중한 격려이다. 그것은, 뼈가 부러져 살갗을 헤집고 나오는 고통 속에서도, 그 영혼을 거인처럼 강건하게 만든다. 여호와 같으신 의사는 없으며, 어떤 강장제도 그분의 약속 같지는 않고, 또한 어떤 포도주도 그분의 사랑 같지는 않다.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참된 사랑이 여기 있다. 만일 이러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면 누가 궁핍한 자를 권고하지 않겠는가? 침상에서 몸을 뒤척이다 보면 침상이 이내 딱딱해지지만, 은혜는 인내를 공급하며, 하나님의 미소는 평화를 제공하고, 또한 그 사람의 마음이 만족스러워지는 까닭에 침상은 부드러워진다. 머리 속이 평화롭기 때문에 베개가 푹신푹신하게 느껴진다. 여호와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르는 그의 침상 전체를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라. 그 얼마나 세심하고도 끈질기신 배려인가!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이 약속을 유업으로 물려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그 축복을 포기하셨으며, 침상에서 편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하지만 거기 달리신 상태에서도, 잠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을 받치사 기운을 북돋워 주셨고, 그래서 그분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 세 구절 속에서 선포된 축복이 궁핍한 자에게 무심코 돈을 주거나 혹은 그것을 사회 단체에 기부하는 이들 모두에게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런 행위도 선하다. 혹은 그런 행동이 단순히 습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그런 행동이 아니다. 여기서의 축복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습관을 지닌 자들을 위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배고픈 자를 먹이며 벗은 자를 입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궁핍한 자를 생각해 줄 역량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자를 성도로 여기는 것은,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바람직스럽게 여기는 것과 같다. 왕께서 영광 중에 오시는 날에 이 점과 관련하여 신앙인이라 자칭하는 자들이 날카로운 검증을 받게 될 것이다. 4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6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7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9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탄원자와 그의 하나님간에 벌어지는 논쟁을 접하게 된다. 그는 궁핍한 자에게 친절한 친구였지만, 정작 자신이 궁핍에 처한 때에는 약속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주님의 경우에도, 본문의 항변과 매우 잘 어울리는 어둡고 황량한 밤이 있었다. 4절. “내가 말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께서 이전에 내게 은총을 베푸사 나로 하여금 형통한 때에 관대하게 행동하도록 하셨으므로, 이제 역경에 처한 나의 영혼에게 은혜 베푸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소서. 이는 공의를 호소하는 내용과는 무관하다. 탄원자는 단지 약속된 상급만을 암시하며, 하나님의 은총에 입각하여 탄원을 올린다. 우리 구속주의 경건한 입에서 그러한 간구가 나올 수 있었을 때에는, 그분의 입술에서 쓰디쓴 몰약이 떨어질 때에는 그분의 낮아지심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슬픔의 근원이 여기에 있었다. 죄와 시련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시편 기자에 있어 죄란 하나님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악함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여기서 참된 회개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다. 만일 무흠하신 구주께서 성도의 죄를 스스로에게 전가시키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표현을 결코 사용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로서는, 전가된 죄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직접 범한 죄를 분명히 지적하는 이 구절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이 간구를 다윗과 다른 죄악된 신자들에게 적용해 보면 이상하게도 참으로 복음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내가 결백해서가 아니라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이것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모든 탄원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것은 얼마나 은혜와 일치하는가! 인간적인 공적과는 또 얼마나 무관한가! 탄원자가 궁핍한 자를 기억했다는 사실도 단지 간접적으로만 암시될 뿐이며, 커다란 범죄로 말미암아 은총에다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 계시하신 선례이므로, 이를 좇아야 한다. “내 영혼을 고치소서.” 내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때가 이르렀으니, 이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고, 나를 강하게 하시되 특히 내 영혼을 강하게 하소서. 우리는 몸의 평안보다는 영혼의 치유를 더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 우리는 영혼의 치유에 관해 많이 듣지만, 종종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을 망각한다. 5절.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악을 행하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특성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다. 더 훌륭한 사람일수록 더 독한 비방의 표적이 된다. 악한 혀는 분주하며, 결코 진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비방을 당하셨다.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그가 사라지기 전에는 그 원수들이 만족할 수 없었다. 악인들이 보기에 세상은 의인들을 남겨 둘 수 있을 정도로 넓지가 않다. 성도들의 몸은 사라질 수 있지만,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그 대적들에게 거침돌이 된다. 바울의 경우에 대적들은,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외쳤다(행 22:22). 만일 핍박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교회는 참으로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도둑들은 어떻게든 양초들을 모조리 꺼버리려 할 것이다. 세상의 빛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 가련하고 눈먼 박쥐들은 등잔에 날아들어 그것을 넘어뜨리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살아 계시며, 성도들과 그들의 이름을 보존하신다. 6절.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가 찾아온 것은 조롱하기 위함이다. 여우가 병든 양을 찾아와서 부드럽게 말하지만, 여우는 양을 잡아먹으려는 바람에서 그 입술을 핥는다. 친절한 척하지만 그 마음속에 악의를 지니고서 남의 침실에 몰래 잠입하는 것은 야비한 일이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위선적인 말이 항상 지긋지긋하며 역겹다. 시련당하는 성도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꼬투리 잡으려고 접근한 거짓된 자들에게서 그런 말을 많이 들으셨다.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새는 깃털로 둥지를 만든다. 화학자들은 가장 달콤한 향기를 발하는 꽃들로부터 독을 추출할 수 있다. 악의에 찬 눈으로 보면, 가장 순수한 언행들 속에서도 비방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거미가 아무런 외부 재료도 없이 거미집을 짓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비열한 자들이 당신 주위에 둘러서서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말을 악한 쪽으로 돌릴까 하고 기다리고 있다면, 이는 결코 작은 시련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곤경을 끊임없이 당했다.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그는 거짓말을 만들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같은 곳에서 두루 퍼뜨리고 다닌다. 그는 집을 나서자마자 그 거짓말을 퍼뜨리며, 친구로서 보살펴야 할 병든 자에 대해 그렇게 한다. 사실, 일관성 없고 닥치는 대로 발하는 병든 친구의 말에 대해서는 비방할 것이 아니라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마음이 시커먼 야바위꾼이 아닌가! 마귀의 자식이 아닌가! 비방을 전하는 일이라면 그 얼마나 먼 곳까지 나아가려 하겠는가! 그들은 거짓말을 기록한 플래 카드를 기꺼이 공중에 매달 것이다. 자그마한 결함도 크게 과장되고, 말을 잘못하면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다. 그것은 실수이자 범죄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면 대개 사람들은 그 중에서 나쁜 의미를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무할례자의 딸들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드에 가서 말하고 아스글론에 가서 선언하라. 쓰러진 사람을 치는 것은 비열한 짓이지만, 사람들은 기독교 위인들을 그처럼 비열하게 대해 왔다. 7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첩자가 비밀 장소에서 자기 동료들을 만나 함께 수군거린다. 왜 그들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는가? 그들은 병든 전사를 두려워했는가? 아니면 그들의 계획이 너무도 반역적이어서 은밀하게 음모를 꾸며야 했는가? 악인들의 만장일치에 주목하라:”다.” 수탉을 쫓기 위해 개들이 얼마나 흔쾌히 마음을 모으는가! 우리가 거룩한 일을 도모함에 있어 악의에 찬 계교를 꾸미는 핍박자들의 절반만큼이라도 합심하면 좋으련만! 우리의 지혜가 그들의 간교함의 절반만큼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그들의 수군거림은 비겁할 뿐만 아니라 간교했고, 모든 준비가 끝나기 전에는 그들의 음모가 알려지지 않는다.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그들은 머리를 모아 계교와 음모를 꾀한다. 아히도벨과 압살롬의 나머지 모략가들이 그러했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그러했다. 악인들은 계교에 능하며 깊이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신실한 자를 해치는 것이다. 풀 속에 숨은 뱀들은 결코 좋은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8절.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그들은 수군거리기를, 그에게 어떤 저주가 임했다고 한다. 그들은 넌지시 말하기를, 추잡한 비밀이 그의 성품을 더럽히고 유령이 그의 집에 출몰한다고 한다. 이처럼 음험한 말 주위에는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에워싸고 있어서, 악의에 찬 수군거림이 얼마나 은밀한지를 암시한다. 심지어는 우리 주님도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았다”는 말을 들으셨다(사 53:4). 그분의 대적들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고 그를 영원히 그들의 손에 넘기셨다고 생각했다.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그들은 그의 질병이 치명적이기를 바랐으며,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 근사한 소식이었다. 의인의 거룩함이 그들의 죄를 은근히 꾸짖었던 만큼, 이제 그들은 의인의 경건함으로 인해 당했던 제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었다. 위클리프(Wickliffe)의 침상 주위에 모인 수도사들처럼, 그들의 예언은 정확하다기보다는 스스로 기쁨에 겨워하는 것에 불과했다. 병든 자에게는 그것이 쓰라린 고통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을 잠시 동안 곤경의 회초리로 치실 때, 대적들은 그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기를 기대하며, 그들의 장례를 자축하기 위해 기뻐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성급했고 자신의 노랫가락을 다른 곡조로 바꿔야만 한다. 우리의 구속주께서 이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즉, 그분은 무덤을 떨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신 것이다. 그분의 무덤을 큰 바위로 막고 인봉하며 또한 감시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분이 다시 일어나심으로 대적들을 혼비백산케 하셨다. 9절. “그렇습니다.” (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역자 주.) 여기서 시련의 절정이 암시된다. 이 표현을 통해 기자는, 마치 그와 같은 악행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강조적으로 확언하고 있다. “나의 신뢰하는 바.” 유다는 주님을 위시한 사도 일행의 회계를 맡은 자였다. 큰 신뢰를 받았던 자가 불성실하게 행동하면 그 행동은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내 떡을 먹던.” ‘손님으로서뿐만 아니라 의존하는 자로서 내 상에서 먹던.’ 유다는 주님과 같은 접시에 놓인 음식을 먹었으며, 따라서 노예의 몸값을 받고서 주님을 팔았던 그의 배신 행위는 더욱더 저주받은 것이었다. “나의 가까운 친구.” 원문을 직역하면, “나의 화평의 사람”이다. 즉, 나와 아무런 불화도 없고, 나와 연합한, 그리고 내게 평화와 위안을 주기 위해 일했던 사람을 가리킨다. 다윗에 대해 아히도벨이 그러했고, 우리 주님에 대해 가룟 유다가 그러했다. 유다는 사도였고, 위대하신 스승과 함께 생활했으며, 그분의 비밀스러운 생각을 들었고, 또한 그분의 마음을 읽기까지 했다. 케사르는 숨을 거두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도?”라고 말했다. 십자가에 박은 못이 우리 주님의 손을 상하게 하였듯이, 배신자의 입맞춤은 우리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내게 등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마치 난폭한 말이 뒷발길질하듯이 나를 심하게 차버렸나이다. 곤경에 처한 우리가 예전에 우리 상에서 함께 먹었던 자들에 의해 발길질당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구속주께서 본절의 끝 부분만을 유다에게 적용하셨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이는, 그분이 유다의 이중성을 미리 알고 온전한 의미에서 그와 더불어 친교를 나누지는 않으셨고 또한 그를 깊이 신뢰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극악무도한 악의로 가득했던 제반 상황은 예수님의 죽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며, 배신은 가장 쓰디쓴 고통들 중 하나였다. 예전의 친구가 대적해 올 때, 자신의 신뢰가 배신당할 때, 그리고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배은망덕한 경우를 당할 때, 우리는 참으로 낙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처럼 한탄스러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할 수 있다. 언약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의 모든 수혜자들을 일일이, 그리고 즉각적으로 도와주신다. 10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10절. “그러하오나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쫓기며 놀란 영혼이 하나님께 돌이키고 있다. 그 영혼은 “그러하오나 여호와여”라는 말로써 한숨을 돌린다.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동정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은총의 소망에 매달린다. “일으키사.” 나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나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소서. 예수님은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그분은 무덤에서 살아나사 승천하심으로써 겸비하신 추락을 마감하셨다.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이는 분명 구약적 간구로서 기독교 정신에서 현저히 벗어난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윗이 사법상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람이라는 점과 또한 그가 자신의 개인적 보복심과는 상관없이 그의 권위를 모욕하고 그의 공적 성품을 훼손시킨 자들을 징벌해 주십사 하고 간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위대한 사도이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개인적 증오심을 전혀 갖지 않으셨지만, 부활을 통해 사망과 지옥에 대해 보복하셨고, 그분의 취지와 인격을 비열하게 공격했던 모든 악의 권세들에게 복수하셨다. 나는 이 시편의 매 구절을 억지로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싶지는 않으며, 옛 경륜을 넘어 복음의 더 밝은 빛에 이 내용을 비춰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11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2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13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11절. 우리 모두는 선에 대한 증거를 보면 즐거워한다. 시편 기자는, 깊은 낙심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대적의 손에 완전히 넘겨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상서로운 징조로 여겼다.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신자는 설령 대적들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들에게 패배하지 않은 사실을 기뻐해야 한다. 설령 바라는 바를 모두 얻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한다. 우리 속에는 불신자들이 의기양양해 하며 비웃는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만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개들의 입이 닫힌다면, 우리는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한다. 마귀가, 궁핍한, 과오를 범한, 몸져 누운, 버림받은, 그리고 비방당하는 성도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온갖 악한 말을 늘어놓아도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며 마침내는 슬그머니 달아나고 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장 연약한 성도라도 승리할 것이다, 설령 사망과 지옥이 그의 길을 가로막을지라도.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내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며, 나는 그 점을 마음으로 확신합니다. 또한 나는 주께서 나를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주께서 그 모든 일들 중에 나를 사랑하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절.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주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나는 순결하고 의로운 삶을 통해 비방자의 손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백함과 일관성은 하나님의 뒷받침에 따른 결과이다. 우리는 굽이 없는 유리컵과 같다. 그것을 바로 세우려면 손으로 잡아 주어야 한다. 스스로 방치되면 우리는 넘어지고 쓰러지며 또한 엉망진창이 된다. 만일 우리가 큰 죄에 빠지지 않고 보존된다면, 우리는 매일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다른 이들이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자신이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죄에 빠지는 것을 볼 때마다, 성도는 오늘은 그 사람이지만 내일은 내 차례라는 마음을 지니고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완전함이란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누릴 때 겸손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에 의해 제시되는 결함들과 무관하다 해도, 우리에게는 비난받아 마땅한 면들이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자랑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울 뿐이다.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그는, 자신을 돌보시며 자신에게 미소를 던지시는 하나님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했다. 세상 군주 앞에 서는 것도 더없는 영광으로 간주되는데, 하물며 영원하신 왕의 궁전에서 영원토록 섬기며 살아간다면 어떠하겠는가? 13절. 이 시편은 송영으로 마감된다. “여호와······찬송할지로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자. 서두에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축복은 이제 종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으로 화답된다. 우리가 여호와의 복되심을 더하게 할 수는 없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원을 피력할 수는 있다. 그분은 이를 기뻐하신다. 이는 마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부터 우리가 자그마한 꽃을 선물받을 때 기뻐하는 것과 같다.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적 칭호로서, 택하신 백성을 향한 그분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무한히 지속할 것임을 최대한 강조한 표현이다. 우리는 죽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아멘 아멘.”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백성들은 거룩한 확언을 거듭함으로써 이 시편 내용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자. 이 마지막 구절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가 적용할 수 있는 기도이지만, 이를 가장 감미롭게 노래할 수 있는 자들은 다윗처럼 극한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아람어 역본에는, “이는 다윗이 궁핍한 자들을 감독할 자들을 임명할 때 지은 시편이다”라고 되어 있다. -아담 클라크. 시 41편 전체. 그리스도와 배신자 유다에 관한 예언.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닐에 의해 인용됨).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주해가들은, 곤궁에 처한 자들을 돌봄으로써 그들에게 자비와 동정심을 나타내는 일을 이 시편이 추천하고 있다는 데에 대체로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여기서 역경에 처한 자들을 지혜롭고 자비롭게 판단하는 자들의 공평함을 추천하고 있다고 하는 주장도 매우 설득력이 있다. 사실, 분사형 “마스킬”(lykcm)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아울러 고찰되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는 곤경과 관련하여 지혜롭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자들을 다윗이 복되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의심의 여지 없이, 다윗에게 임한 곤경은 의로운 욥에게 닥친 것과 같은 곤경이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그를 너무도 혹독하게 다루시는 것을 보고서, 그를 가리켜 가장 악한 자들 중 한 사람으로 여겼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곤경에 시달리는 자들을 정죄와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들로 여기는 오류를 너무도 흔히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대체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관련하여 성급하고 분별 없이 말하는 편이며, 말하자면 곤경 속에서 괴로워하는 자들을 가장 깊은 나락으로 빠트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처럼 성급하고 방자한 마음을 제지하기 위해 다윗은 이르기를, 말을 함부로 하여 자기 이웃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한다. 그런 자들은 이웃에게 닥친 곤경을 올바로 분간하며,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이 너무도 쉽게 이끌리기 쉬운 냉정하고 부당한 판단을 지혜롭게 누그러뜨린다. -존 칼빈.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궁핍한 처지를 권고하셨듯이, 우리도 궁핍한 처지에 계신 그분을 권고해야 하며,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권고해야 하고, 또한 가련하고 곤궁한 지체들 가운데서 당하시는 그분의 고난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우리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여호와의 축복과 구원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그분을 위해 자기 형제들을 사랑하고 구하는 자들에게 축복과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조지 혼.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빈약한 자”란, 세상의 궁핍한 자들 전체를 가리키거나 궁핍한 성도들을 특별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한 개인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단수형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사한다. 40편 마지막 절에서는 그분을 가리켜 “가난하고 궁핍하오나”라고 표현한다. -존 길.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궁핍한 자를 돌보는 일에 참여케 하는가 하는 점이다.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궁핍한 자를 동정하라’고 명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단지 그런 식으로만 언급되어 있다면, 충동적이고 성급한 동정심의 분출로 인해 그들의 필수품들까지 내어놓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단순한 동정이라고 하는 감정보다 더 나은 보증을 제공해 준다. 그 감정은, 흥분시키는 데에 아무리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통제되고 억제되어야 한다. 감정이란 애매하고 변동이 심한 보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상에 의해 그릇 이끌릴 수 있다. 삶의 엄연한 현실이 그것을 역겹게 만들 수도 있다. 낙심이 그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 배은망덕이 그것을 악화시킬 수 있다. 기만은 그것을 잘못된 대상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다.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그것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지각 가능한 대상에 대한 느낌을 필요로 한다. 추상적이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의 결핍 상태가 열정과 생기를 지닌 감정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성경은, 궁핍한 자를 돕는 것을 단순한 본능적인 동정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권고’의 주제로 삼고 있다:”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권고한다는 것은 신중하며 따분한 일이다. 그것은 어떤 친절을 베풀고 떠들썩하게 감사를 받는 일과 별로 상관이 없다. 성경은 그 취지를 부주의하거나 무분별한 마음으로 인해 빠질 수 있는 폐해로부터 구해 준다. 성경은 그것을 보다 높은 인식 역량에다 맡긴다. 그 인식 역량인즉, 선행에 싫증내지 않고 보다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며, 또한 역겨움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보다 꿋꿋하게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우리에게 빈약한 자를 ‘권고하라’고 명하며, 그 덕목을 실천함에 있어 단순한 정감뿐만 아니라 치밀한 생각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 일을 추진함에 있어, 우리는 여러 가지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어떤 때에는 권고 대상의 실질적 관심사보다 단순한 연민에 더 이끌리는가 하면, 자신이 기대했던 사의나 정직한 태도를 마주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분한 마음과 실망에 사로잡혀 지레 물러나는 때도 있다. 또 어떤 때에는 영원을 망각하고서 조바심과 염려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권고’는 우리를 이 모든 오류들로부터 구해 주는 역할을 한다. 권고를 길잡이로 삼을 때, 궁핍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탄탄한 원리로 성숙되어 간다······. 우리 모두에게 분명한 사실은, 돈을 주거나 자선 기부자들의 명단에 우리 이름을 첨가시키는 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일을 판단력을 가지고서 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과 관심을 투자해야 한다. 우리는 곤경에 처한 형편이 과연 어떠한지를 직접 느끼며 조사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색으로부터 깨어나서 선행을 베풀 대상과 친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그 빈약한 자의 병상으로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친히 자신의 손을 뻗어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하고 순수한 인자이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문서에도 기록될 수 없다. 하지만 만일 그 일이 기독교적 원칙에 따라 행해지면, 한마디로 말해 만일 그 일이 예수께 행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늘의 책에 기록되며, 그분의 제자들이 고대하는 면류관에 새로운 광채가 더해질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 면류관을 영원토록 쓰게 될 것이다. -토머스 찰머스(Thomas Chalmers, D.D., LL.D., 1780-1847), 성 앤드류 교회에서 극빈 환자 구제 협회(the Society for Relief of the Destitute Sick) 모임 때에 행한 설교.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언젠가 함께 동행했던 피에몬테(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역자 주) 출신의 어느 귀족이 토리노(피에몬테 지방의 주요 도시-역자 주)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나는 삶이 지긋지긋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죠. 목숨을 끊고 싶어서 강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는 중에, 나는 갑작스럽게 뒤에서 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한 어린 소년이 내 외투자락을 붙잡고서 무엇인가 간청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표정이나 태도는 막무가내였죠. 그 아이가 배운 것이라고는 매달리는 일뿐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모두 여섯 명인데, 양식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답니다’라고 그 아이가 애원했어요.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습니다:’이 불쌍한 가족을 내가 왜 구제하지 않겠는가? 내게는 돈이 있고, 이 가족을 돕는 일은 불과 몇 분이면 될 것이다.’ 그 비참한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죠. 나는 그들에게 지갑을 던져 주었고, 그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했지요. 그 모습은 줄곧 내 눈에 선했으며,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강심제 역할을 했습니다. 나는 ‘내일 다시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한 기쁨을 그토록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이 세상을 내가 떠날 생각을 했다니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사무엘 로저스(Samuel Rogers, 1763-1855), 이탈리아에서. 1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가 독수리처럼 활기차듯이, 기독교적 사랑은 뜨거운 심령을 동반한다. 우리가 슬퍼하며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간청하는 자에게 결핍된 것을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며, 시련당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며, 또한 치유해 줄 마음은 없이 고통스러워 하는 말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질병이나 고통이나 재난에 시달리는 자들에게는, 이런 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독교적인 심령은 사랑으로 도움을 베푼다. 도움을 호소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며, 행할 바를 찾아나선다. 아니, 궁핍한 상황을 미리 예방한다. 온갖 불행에 처한 자들을 최선을 다해 도우며, 장차 닥칠지도 모를 곤경에 대처할 구제의 나무를 심는다. -조지 크래브(George Crabbe, 1754-1832). 1절. 부를 나누어 줌으로써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뿐 그것을 움켜잡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는 않는 자들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가! 재물을 쌓아 두는 자는 선한 ‘간수’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나누어 주는 자는 선한 ‘청지기’이다. 상인들은 자기 상품의 희소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프랑스로 가져가기 위해 영국에서 포도주를 사지는 않으며, 인도로 가져가기 위해 프랑스에서 향료를 사지는 않는다. 힘든 사역과 노고 혹은 회개와 고행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천국에는 그런 것들이 없으며, 평안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뿐이다. 나름대로 귀중한 상품을 지니지 않은 상인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천국문에 도착하는 자들에게, “네가 일한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것이다. 각 사람은 자신이 행한 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이다(계 22 :12). 우리는 이 땅에서 재물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땅에는 우리의 재물을 필요로 하는 궁핍한 자들이 있다. 하늘에는 부요함만 있을 뿐 궁핍함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당신의 돈을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당신은 내세에서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재물을 재량껏 사용할 수 있는 동안에 선을 행하라. 자신에게 재산이 있는 동안에, 억압받는 자를 구원하고 고아를 구제하라. 당신이 죽을 때 당신의 재물은 다른 이들의 소유가 된다. 등불 하나를 앞에 들고 가는 것이 스무 개의 등불을 들고 뒤에서 따라오는 것보다 밤길에 더 유용하다. 낙심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당신의 눈으로 직접 살피고, 또한 당신의 손으로 직접 도움을 베풀어라. -프란시스 라워스(Francis Raworth)의 장례식 설교, 1656. 1, 3절. 부족한 무엇을 공급받는 것은 복된 일이다. 하지만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한층 더 복되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누구를? 빈약한 자를! 세상은 그에게 냉혹하다. 그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이 따로 정해져 있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을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입장도 세심하게 배려해 주라. 그 궁핍한 자가 만족해질 때까지 주라. 배고픈 자에게 곡식단을 나누어 주며, 심지어 자신의 영혼까지라도 나누어 주라. 하지만 만일 곤경이 닥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돈을 혼자 보관해 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나 돈이 사람을 구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돕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반면에 만일 어떤 사람이 관대하다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되’, 그분께서 친히 구원하시거나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이나 수단을 통해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한편, ‘질병’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신다.” 이 얼마나 크신 자비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신다.” 빈약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여기 있다. 그들은 “나는 빈약한 여자이니, 내가 무슨 자비로운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병든 자들의 침상을 가장 잘 펴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건대, 그들의 행위는 매우 큰 자비를 나타내는 일이다. 병든 자의 침상을 펼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처드 캐플(Richard Capel). 1, 5절. “권고하는 자.” “나의 원수.” 스트리겔리우스에 의하면, 이 시편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소수 사람들과 그들을 괴롭히는 다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대조되고 있다고 한다. -윌슨. 2절.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빈약한 자를”, 특히 병들고 궁핍한 자를 권고하는 인정 많은 자들이 자기 자신의 자애로운 행실로 인해 해를 당하는 법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들은 빈약한 자를 찾아내기 위해 지하 창고, 다락방, 비좁은 뒷길 등을 두루 살피며, 심지어는 전염병이 도는 곳도 지나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을 살리시며 보호하신다. 그 반면에 전염병을 피해 멀리 달아난 자들이 오히려 그 병에 걸리고 만다. 하나님은 자애로운 사람을 사랑하신다. -아담 클라크. 2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경건한 자에게 닥치는 그 어떤 곤경도 이 세상에서 이미 그에게 임하기 시작한 복을 훼방하거나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데이비드 딕슨. 3절.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펼치시는 자비의 손길은 그 얼마나 세심하고 감동적인가! 여기서 우리는, 구주께서 베드로에게 가서 그 발을 씻기려 하셨을 때 그가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요 13:8)라고 말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 느낌을 받는다:’주께서 내 침상을 절대로 펴지 못하시리이다.’ 하지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의 병상을 펴지 아니하시면 거기에는 평화나 위안이 전혀 없다. 다윗은, 마치 자녀의 입에서 나오는 희미한 소리까지 포착하려고 귀를 기울이는 어머니처럼, 여호와께서 겸비하게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요청한 바 있다(시 40:1 참조). 이러한 이미지는 가장 감미로운 동정심과 겸손으로 가득 차 있다.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고 말씀하셨거니와, 이제 여기서도 병든 자를 부지런히 돌보시는 자애로운 사역을 성취하는 종의 모습으로 언급되고 있다. -바르통 부시에. 3절.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본문의 의미는 오히려 다음과 같다:”그것은 더 이상 병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의 질병을 치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스튜어트 퍼론. 3절. 의인이 질병에 걸려 불편할 때, 하나님은 그의 잠자리를 친히 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베개와 덧베개, 머리쪽과 발치와 옆구리쪽 등, 침대 자리를 모두 펴주시는 것이다. 그의 키나 성향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은 그의 잠자리를 편안하게 펴실 수 있다. 한편, 주께서 침상을 그에게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를 침상에다 맞추신다는 데서, 그분의 탁월한 솜씨가 드러난다. 만일 내게 펼 자리가 없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내 자리를 펴주실까? 내게 펼 자리가 없어도 그분은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다. 야곱이 땅바닥에 누워 잠들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보살펴 주지 않으셨다면 어찌 그가 천상의 꿈을 꿀 수 있었겠는가? -토머스 풀러. 3절. 하나님께서 펴시는 자리는 안락할 것임에 분명하다. -토머스 왓슨. 3절. 동양식 침상을 서양식 침상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동양식 침상이란 매트리스나 두텁게 솜을 넣은 누비이불 그 이상이 아니었으며, 불편해지면 그것을 뒤집어서 깔았다. 본문이 나타내는 의미도 바로 그것이다. -C. H. S. 3절. 나의 사랑하는 친구 벤자민 파슨즈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무렵에, 나는 그를 찾아가서 “여보게, 오늘은 어떤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 머리 밑에는 세 가지 안락한 베개들이 받쳐져 있다네. 무한하신 권능, 무한하신 사랑, 그리고 무한하신 지혜 등이 바로 그것들이지”라고 말했다. 얼마 후에 브라이턴에 있는 캔터베리 홀에서 설교하면서, 나는 그가 했던 말을 언급하였다. 몇 달 후에 나는, 가난하지만 경건한 어느 젊은 여성의 임종 자리에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죽기 전에 목사님을 뵐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목사님이 벤자민 파슨즈와 그의 세 가지 베개들에 관해 하신 이야기를 저도 들었답니다. 끔찍스러운 수술을 받는 동안 나는 베개를 배고 있었는데, 의사가 베개를 치우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베고 있으면 안 되나요?’ 하고 물었더니, 의사는 ‘아가씨, 안 돼요. 치워야 한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하지만 선생님이 벤자민 파슨즈의 세 가지 베개들을 치울 수는 없을 겁니다. 나는 무한하신 권능과 무한하신 사랑과 또한 무한하신 지혜를 벨 수 있습니다.'” -팩스턴 후드(Dark Sayings on a Harp, 1865). 3, 4절. 다윗은 질병 가운데서 자기 마음의 깊은 바닥으로부터 무슨 말을 했는가? 그는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만 간구하지 않았다. 병든 다윗은 먼저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라는 약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고 나서,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라고 덧붙인다. ‘여호와여, 내 영혼의 질병인 나의 탐욕을 멸하사 내 영혼을 치료하시며, 또한 생명을 회복시켜 주님과 새롭게 교제하게 하소서. 그렇게 할 때 내 영혼이 강건하나이다. 이 질병과 죽음에서 벗어나게만 하지 마시고, 이 죄를 없애 주소서. 이 죄는 주를 욕되게 하였고 주님과 저를 서로 분리시켰나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토머스 굿윈. 4절.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가 구한 것은 공의가 아니라 긍휼이다! 지극한 곤경에 처한 자를 위한 지극하신 긍휼이다. 공의로 말하자면 그는 마치 더러운 누더기와 같았다. 육체 가운데는 선한 것이 전혀 거하지 않는다. 또한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은 채소도 아니고 석고 붕대도 아니며, “만물을 치유하시는 주의 말씀이다”(솔로몬의 지혜서 16:12). -토마스 아퀴나스, 닐에 의해 인용됨. 4절.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은혜로운 성향이 쇠하여지고 죄가 점점 기세를 더해갈 때, 하나님은 그를 치유하며 회복시키사 힘이 되어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가운데서 행할 때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지만, 죄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따라서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다윗이 간구한 바를 그분의 백성에게 약속하셨다:”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호 14:4).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은혜가 쇠약해지면, 그는 즉시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다윗과 에브라임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 하나님이 의사가 되사 그 질병을 고치실 것이다. 다윗 역시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했으며, 이로 인해 찬양을 드렸다(시 103:3). -사무엘 블랙커비(Samuel Blackerby). 4절 하반절. 사울과 유다는 “내가 범죄하였사오니”라고 말했지만,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라고 말했다. -윌리엄 플러머. 5절.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여기서의 악담이란 저주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존 칼빈. 5절. “그 이름.” 하나님의 참된 종의 이름과 성품과 특권 등은 불신자들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며, 불신자들은 그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윌슨. 6절.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럴 듯한 말을 많이 하지만, 그 중 하나도 참된 것이 없다. -데이비드 딕슨. 6절. 나는 브로미아르두스(Bromiardus)에게서 들은 멋진 우화를 기억하고 있다:매우 추운 어느 날 아침에, 한 새 사냥꾼이 오랫동안 주시해 왔던 자그마한 새들을 많이 잡고는 또 그물을 쳐서 낚아챌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지바퀴 새끼 한 마리가 혹한 때문에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서 엄마새에게, “가련한 새들의 재난 때문에 저토록 비통하게 우는 것을 보건대, 저 사람은 매우 자비롭고 온정적임에 분명해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엄마새는 새끼에게 지혜롭게 이르기를, 그 사람의 본심을 그의 눈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의 손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배신의 손으로 몰래 내려친다면, 아무리 그럴 듯하게 말하고 동정적으로 운다 할지라도 그를 결코 친구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6절.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1) 죄 위에 죄를 보태는 방식으로, 그는 끔찍스러운 위선으로 자신의 악의를 덮는다. (2) 나를 올무에 빠트리기 위해 그리고 내게 해악을 끼치기 위해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온갖 방식을 다 궁리함으로써, 그의 부패한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한다. (3) 가능한 한 내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살피고 끌어내어 그것을 자신의 마음속에 쌓아 둠으로써, 나와 관련하여 부당한 추측과 비판을 내리는 근거로 삼는다. -아서 잭슨. 8절.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벨리알의 악한 행위가 그에게 달라붙었다.’ 문법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벨리알’이라는 단어는 “벨리”(ylb)와 “야알”(l[y)이 합쳐진 것으로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벨리알의 일'(‘악한 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한 것임)이라는 표현은, 결코 사함받을 수 없다고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날 가능성도 없다고들 흔히 말하는 특별하고 가증스러운 범죄를 의미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를 곤경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의 대적들은 곤경에 처한 그를 가리켜 불치병에 걸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존 칼빈. 8절. “악한 병.” 여기서 ‘다바르-벨리알'(l[ylbArbd)이 무슨 뜻인지를 규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고대의 주해가들은 대체로 이를 ‘왜곡된 말’, ‘해로운 말’, 혹은 ‘사악한 말’로 번역한다. 갈대아역은 ‘왜곡된 말’로, 아람어역은 ‘불법의 말’로, 칠십인역은 “로곤 파라노몬”(logon paranomon)으로, 라틴어역은 ‘사악한 말'(iniquum verbum)로, 그리고 아라비아어역은 ‘율법에 반대되는 말’로 각각 번역했다. 따라서 그것은 ‘심한 비방’ 혹은 ‘중상’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벨리알의 사람들’이 중상하는 자들이듯이, ‘벨리알의 말’도 중상하는 말을 뜻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말은 어떤 사람에게 달라붙어 악한 자국을 남기는 경향이 있다. -헨리 해먼드. 9절. “나의 가까운 친구.”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구속주의 고난처럼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의 공개적인 대적들은, 그의 친구로 가장하는 자들이 그를 손아귀에 넣기 전까지는, 그에게 해를 가하지 못한다. 부자연스러운 듯한 일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환대를 받은 자들이 때로는 가장 먼저 그를 대적하여 그에게 “발꿈치를 든다.” -조지 혼. 9절. “나의 가까운 친구.” 그는 나를 방문하여 사랑과 존경의 입맞춤으로 내게 줄곧 문안하였으며, 평안의 안부를 물었다. -헤르만 베네마. 9절. “내 떡을 먹던.” 오늘날의 아랍 베두인들간에는 함께 떡과 소금을 먹는 자나 그의 소유물에 대해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러한 정서가 당시 히브리인들간에도 퍼져 있었다면, 본문은 매우 강렬한 의미를 담은 표현인 셈이다.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뒷발꿈치로 공격하는 말의 모습에서 이끌어낸 은유이다. 우리 주님도, 수사학적 예증이나 강조의 일환으로, 요한복음 13:18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조지 노이스(George R. Noyes, D.D.). 9절.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자기 주인을 발길질하는 짐승을 암시하는 듯하다. 혹은, 땅에 넘어진 자를 경멸하는 뜻에서 걷어차거나 짓밟는 행위를 암시하는 듯하다. -아서 잭슨. 9절.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버릇 사나운 짐승이 뒷발질하듯이 나를 걷어찼으며, 곤경에 처한 나를 모욕했나이다. -다니엘 크레스웰. 10절.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이는 다음 두 가지 의미들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1) 해를 끼치는 자에게 친절을 베풀게 되기를 간구함(시 35:13처럼). 자신의 손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선을 베풀며, 심지어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자들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은, 선하고 용감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2) 악행에 대한 징벌을 간구함. ‘나로 하여금 그들을 징벌할 수 있게 해주소서.’ 그가 그들의 재판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자라는 것이다. -마틴 가이어. 10절.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다윗은 평범한 백성들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왕으로서 권위를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그가 대적들에게 응분의 징벌을 선언하고자 한 것은, 육신의 충동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자기 직무의 성격 때문이었다. -존 칼빈. 11절.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게 대적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나를 압도하는 곤경이 전혀 내게 닥치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따라서, 수많은 곤경들이 기록되었을 때 그는, 마치 빚을 갚은 상인이 그 금액을 채무 장부에서 지워버리듯이 그것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많은 곤경’이 적혔던 자리에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고 적었다. 그분은 모든 죄들을 사하셨기 때문에, 모든 곤경들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그분 이외에 다른 어떤 구속주나 조력자 혹은 위안자도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 주실 것이다. -헨리 스미스. 11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알 수 있다. (1) 다윗이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확신하였는가 하는 점. (2) 다윗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신시켜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렸는가 하는 점. 먼저, 다윗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두 가지 논거를 통해 확신했다. 첫째 논거는 그의 대적들로부터 이끌어냈다. 즉, 그들의 기대가 제지당했으므로 주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논거는 그 자신의 상태로부터 이끌어냈다. 즉, 그의 상태는 대적들에 의해 전혀 훼손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아졌다는 것이다······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깨달음에 관해 이야기하며, 비록 자신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점은 알고 있노라고 말한다. 또한 그 점을 알고 있는 한, 그는 다른 문제들을 크게 염려하지 않았고, 세상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할까 하는 점도 염려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점을 확신하는 자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창조주로서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며, 자신이 지으신 것들 중 어느 하나도 미워하지 않으신다. 특히 택하신 자녀들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서 다른 피조물들에 비해 더욱 각별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는 모든 것에 대해 확신을 지닌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좋은 것을 하나도 아끼지 않으시며 심지어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 어느 자녀가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확신할 때, 그는 아버지에게 이것 저것을 담대히 구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그분께 무엇이나 담대히 구할 수 있다. 이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리스도께 단 두 가지 사항만 상기시킨 것과 같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점이고, 둘째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 그분이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를 그분께 말씀드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이 그를 사랑하시므로 꼭 필요한 조치를 취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도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주님,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그 영혼이나 육신을 위하여 이것 저것을 원하나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께 무엇을, 언제, 혹은 어떻게 해달라는 식으로 정해 드릴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일을,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행하실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실을 알고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또한 그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할지라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실만은 우선적으로 확신해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을 확신하지 못해도 이것만은 확신해야 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택함받은 사실을 확신하라고 권면한다. 욥은,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욥 19:25)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구속함받은 사실을 확신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여기서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도록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그 점을 확신한다면, 우리가 택함과 구속을 받은 것도 확실하며, 우리의 소명도 확실하고, 또한 우리의 구원도 확실하다. -윌리엄 버턴(William Burton, 1602). 11절.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들의 손에서나 다른 어떤 곤경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이를 통해 우리는 다윗처럼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은총을 확신할 수 있다. 한편,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를 사랑하신다면 교회가 대적들로 인해 곤경과 괴롬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인즉,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분의 사랑이 교회를 구원하시는 가운데 더욱 분명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친구는 어려운 시기에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듯이,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우리를 도우시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담의 타락은 한편으로 징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사함을 통해 그분의 자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닥치는 곤경들은, 먼저 죄로 말미암은 우리의 황량한 상태를 드러내며, 둘째로, 우리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셋째로,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찬송과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로만 돌릴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는 대적들에 의해 시달릴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비록 병에 걸리긴 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과 같다. 주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셔서 그를 회복시키셨던 것처럼, 그분은 교회를 사랑하시므로 교회를 회복시키신다. -윌리엄 버턴. 11절.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된 자들을 지키시며, 그 대적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신다. 고난 주간이 지나면 부활절이 도래한다. -J. P. Lange’s Commentary. 12절. “완전.” 이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것이다. 방주 밖의 모든 사람들이 멸망당할 때, 노아는 방주 속에서 보호를 받았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주었던 붉은 줄(수 2:18)과 같다. 여리고 성의 다른 모든 이들이 진멸을 당했을 때 그 줄은 라합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특허장 역할을 했다. 이러한 “완전”은, 이 땅 이외에 하늘나라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칼이 들이닥쳤을 때 라합의 줄이 다른 모든 것들보다 그녀에게 소중했듯이, 죽음이 임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완전”이 온 세상보다 더 귀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자신 속에 이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은 염려하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어떤 일이 닥칠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만일 사탄이 공격을 해오면, 이것이 증거하는 투구의 역할을 한다. 만일 사탄의 화살이 날아오면, 이것이 그것들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한다. 만일 고난의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가려고 하면, 이것이 우리를 태워 줄 배의 역할을 한다. 설령 온 세상이 우리 얼굴에다 진흙과 오물을 던진다 해도, 우리는 더 이상 흉하게 일그러지지 않으며,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딸”(시 45:13), 곧 그리스도의 교회는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윌리엄 버턴. 12절. “나를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혹은, ‘나를 주의 앞에 확고히 세우시나이다.’ 주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게 하신다는 뜻이다. 혹은, 주의 성전에서뿐 아니라 주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혹은 주께서 특별히 임재하시는 땅에서 주를 섬기게 하신다는 뜻이다. -매튜 풀. 13절.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얻는다. (1)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분은 그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위해 위대하고 자비로운 일들을 행하셨고, 더 좋고 더 많은 일들을 예비하고 계신다. (2)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분의 존재와 복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 (3) 큰 사랑과 열정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아멘 아멘”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사실에 대해 이중으로 확증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며,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게 하자. -매튜 헨리. 13절. “아멘 아멘.” 시편의 기자가 여러 사람이듯이, 이들 전체는 한 권의 책으로 구성되지도 않는다. 사실상, 시편은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을 구분해 주는 경계선은 매우 분명하다. 41편, 72편, 89편, 그리고 106편의 끝 부분에서, 송영에 이어 엄숙한 “아멘”이 한 번이나 두 번 언급되고 있다. 이는 한 책이 끝나고 다음 책이 시작되려 함을 암시한다. 시편들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각 책에 나름대로의 특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제1권에서는 “야웨”(여호와)라는 성호가, 그리고 제2권에서는 “엘로힘”(하나님)이라는 성호가 각각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플럼프트(E. H. Plumptre, M.A., Biblical Studies, 1870). 또한 시편의 제1권과 제2권간에는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제1권에서는 머리말이 딸린 모든 시편들을 다윗의 저작이라고 분명히 밝히는 반면에, 제2권에서는 일련의 시편들이 레위 지파에 속한 노래하는 자들의 저작으로 언급된다. -스튜어트 퍼론. 이러한 구분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현재로서는 확언할 수 없다. 제롬은 마르셀라(Marcella)에게 보낸 서신에서, 시편이 히브리어 원문상 다섯 권으로 구분되어 왔다고 언급했다.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도 같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그들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각 권의 맨 마지막에 첨부된 찬양 형식이 칠십인역에 나오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구분이 칠십인역 번역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한 구분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여 새 성전에서의 여호와 예배를 확립하고 난 무렵에 에스라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에스라는 모세 오경의 구분을 본떠서 그렇게 구분했을 것이다. 히브리어 원문상의 시편을 이처럼 구분함에 있어서, 주제별 모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존 칼빈. 시편 제1권을 구성하는 41개의 시편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연관된 내용이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대망했던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42편에서 시작되는 제2권은 주로 그리스도의 유아교회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윌슨. 현대 찬송가들이 해마다 몇 편씩 첨가되는 경우를 시편에도 적용해볼 수 없을까? 그러한 적용이 가능하다면, 순전히 다윗의 저작인 시편 제1권은 급속히 첨가된 다른 성가들에 비해 핵심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C. H. S. [설교힌트] 1절 상반절. 경건하고 빈약한 자를 권고함으로 말미암아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축복들. (1) 감사를 배운다. (2) 인내를 배운다. (3) 종종 위대한 은혜의 승리를 목격한다. (4) 기독교적 체험을 얻게 된다. (5) 우리의 권고를 받는 자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준다. (6) 선행의 즐거움을 누린다. (7) 겸비하신 구주와의 친교에 들어간다. 1절. 스몰 폭스(Small-Pox) 병원들의 지원 현황은 추천할 만하다.-스콰이어(Squire) 주교(1760). 이런 종류의 수많은 설교들이 이 본문을 기초로 행해졌다. 2절.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경건한 자들에게 보장된 지상적인 축복은 어떤 것들이며, 이생과 관련된 축복이란 대체로 어떤 것인가? 2절 중반절. 곤경 중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급함으로부터, 절망으로부터, 죄악된 수단들로부터, 난폭한 공격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하는 폐단으로부터. 3절. 연약한 가운데 얻는 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며,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끝까지 지속되며, 죽음을 맞아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은혜의 실재를 입증하고, 또한 다른 이들을 믿음에로 이끄는, 내적인 힘. 3절 하반절. 천상적인 시중. 4절 상반절.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회개, 겸손, 진지함, 믿음, 끈기, 하나님 경외 등을 표현하는 말이다. 4절. “내 영혼을 고치소서.” (1) 유전성 질병으로서, 수많은 장해들을 야기시킨다-노골적인 범죄, 불신, 은혜의 쇠퇴 등. (2) 그 질병에 맞서 싸우는 영적 건강-영적 고통, 소원, 기도, 노력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3) 능력을 입증받으신 의사. 그분의 말씀으로, 그분의 피로써,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써 치유하셨고 또한 치유하실 것이다. 4절. “내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이 고백은 개인적이며, 분명하며, 핑계를 대지 않으며, 또한 포괄적이고도 이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주께.” 5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대적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는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가? 예컨대, 기독교적인 삶과 이름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것을 기도로 주께 고하라. 악인들로부터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6절 상반절. 천박스러운 방문의 어리석음과 죄악됨. 6절 중반절. 본문에 대해 ‘넝마주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모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모은 것을 어디에 두는가-“그 중심에.” 그것으로써 무엇을 하는가? 그것을 통해 그는 무엇을 얻는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7-12절.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으면, 자신의 대적들과 친구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더욱 소상하게 알게 된다. 9절. 가룟 유다의 변절. 11절. 시험으로부터의 구원, 이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표시이다. 12절. 본문은 은혜받은 자들의 표시를 드러낸다. (1) 그들의 완전함이 밝혀진다. (2) 하나님이 그들의 성품을 보존하신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한다. (4) 그들의 신분은 안정되고 지속적이다. (5) 그들의 영원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 13절. (1) 찬양의 대상-여호와, 언약의 하나님. (2) 찬양의 성격-시작도 끝도 없음. (3) 찬양에의 참여-“아멘 아멘

2018/06/09(토) “시편 41:1-13”/ 작성: 김대인

본문 : 시편 41:1-13

찬송 : 456장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가난한 자를 향한 위로와 회개(1~5)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41편은 다윗의 시로 인도자의 지휘에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그 기도가 응답된 이후에 드리는 감사의 찬양시로서, 함께 부르는 회중들의 신앙과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주는 시편입니다. 기록 시기와 배경에 대해서 밝히는 내용은 없으나, 본문의 내용으로 보건대 시인은 범죄함으로 인해 질병을 얻었으며, 원수들의 비방속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 하였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대적자로 바뀌는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많은 학자들은 시인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유랑하는 가운데 지은 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절은 복이 있다는 히브리어 ‘에세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이 시작될때에도 ‘에세르’ ‘복 있음이여’로 시작하고, 제 1권의 마지막인 시편 41편도 ‘복 있음이여’로 문을 열고 있습니다. 즉 시편의 제 1권이 말하는 전체적인 주제는 누가 복이 있는 자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복된 삶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각 시편마다 다양한 복과 복된 삶에 대해서 기록하였지만, 오늘 본문인 41편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삶이 곧 복된 삶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경제적인 궁핍, 형편의 어려움, 실패와 절망, 갑질과 억압에 고통당하는 이들을 향해 마음다해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친절을 베풂이 나의 선행에 되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향하기는 쉬우나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향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말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물질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고, 넘어지고 실패한 이들은 누군가의 일으켜 세워줌이 필요하며, 억압에 시달린 이들은 억압으로부터 자유함을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보살피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사칼’은 연민의 마음 뿐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까지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어려운 형편과 상황에 처한 이들을 구체적인 행위로 돕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시간과 열정 뿐만 아니라 물질도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 다해 가난한 이를 돕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재앙에서 건져주십니다. 잠언 19장 17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백성의 삶 전부를 지켜주시고 복을 내려주시며,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십니다. 본문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것은 되돌려받을 수 없는 낭비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소비를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며, 하나님께서 대신하여 갚아주신다면 베푸는 자의 삶은 활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병상의 자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싸매어주심으로 인해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시인의 상황은 누군가를 도울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나의 원수가 네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자신의 형편 또한 넉넉하지 못하고 평안한 상황이 아닐지라도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음을 아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가난한 자들이 생기고 아픔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흉악한 범죄가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는 총과 칼을 들고 싸우며, 배를 굶주리며 말라가는 사람이 있고, 목숨을 걸고 난민생활을 하게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무관심하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악때문입니다. 내 욕심이 누군가에게 주어져야 할 것을 빼앗았습니다. 더 편안하고자하는 마음이 누군가를 더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쓰지 않을 물건이나 상품을 사느라,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아픔을 외면했습니다.

이 인식이 있다면 고통스런 세상을 보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용서, 사랑과 자비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욕심으로 뭉쳐있는 나도 그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원수를 향한 기도(6~13)

6~13절에는 다윗이 원수들을 향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도 원수들은 다윗이 더욱 더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도록 악담을 일삼았습니다. 누군가의 파멸을 고대하며 저주와 악담을 하는 원수의 마음은 얼마나 처참하고 황폐하겠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 사람이 상하기 전에 미워하는 이의 마음이 먼저 무너지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다윗의 파멸을 고대하는 원수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원수는 끊임없이 다윗을 향한 저주와 거짓, 증오와 헛된 꾀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본문 6~8절입니다.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혹독한 질병속에서 원수의 간악한 계획들을 온몸으로 받아야하는 다윗은 시를 노래하는 동안에도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알고 당하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지만, 더 괴롭고 아픈 상처는 가깝게 믿음과 마음을 나누던 친구가 나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가까운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3년동안 함께 먹고 마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야기하였고, 많은 추억들을 공유하던 관계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진 관계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안에서 나눌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나누며 살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가룟 유다는 거짓 입맞춤으로 스승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대제사장 무리들에게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가룟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사랑하는 제자 외에 모두 주님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1-23절입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원수들의 적대, 친구의 배신, 끝을 알 수 없는 투병생활속에 있다면 누구도 위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만이 구원임을 알고 기도합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사람은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내 발등을 찍을 수 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인생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 할수 있습니다. 자신있던 건강도 갑자기 찾아오는 질병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시인 다윗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하나님을 대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신실하게 반응하고자 다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사업도, 가정도, 친구도 우리의 목적이자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삶에 찾아오는 어떤 어려움도 견디고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원수에 둘러쌓이고 육체의 질병에 신음하고 있어도 ‘여호와의 은혜’라는 반석 위에서 견고하게 서며 시편 41편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많이 가졌으나 영혼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육체적인 질병과도 싸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의 질병과도 싸울 것입니다. 원수는 물론이거니와 믿었던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같은 삶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께 매여 살아갈 때, 삶의 목적 되신 하나님께서 환경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영원의 기쁨과 희락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려야만 찬송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오늘도 말씀을 통해 봅니다. 원수가 미워하고, 질병이 나를 억누르며, 친한 친구가 배신하여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아침이 우리 삶을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세우는 아침이 되게 하옵시고, 주님께 매임으로 세상의 것들에 자유하며 영원을 누림으로 유한한 것들에 미련을 버리는 결단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와준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때 그 경험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습니까?

2.현재 내 주변에 가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가난한 자를 도우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말씀(잠19:17)을 읽고 내가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4. 다윗처럼 나도 원수들을 향해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를 할지 기도문을 적어봅시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라는 신앙의 고백도 적어봅시다.

(작성: 김대인)

시편 41편 & 성경주석

<시편 41편 서론>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시 41편은 시인이 그의 생애에서 중병에 걸려 있던 때를 다룬 시이다. 시인은 이전에 자기의 친구였던 자들이 지금은 배신자가 되어 있는 것을 깨닫고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고통을 느낀다. 이 시는 궁핍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복에 대한 기술로 시작하여, 계속해서 이전에 친구였던 자들의 배반을 묘사하고, 마침내는 회복을 염원하는 소망 기도로 끝을 맺는다. 이 시는 시 38편을 닮은 시이다.

<시편 41편 개역한글>

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11.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2.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13.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시편 41편 성경주석>

41:1 빈약한 자.

히브리어 달(dal), “낮은 자들”, “무력한 자들”, “풀이 죽은 자들”, “가난한 자들.”

41:1 권고하는.

곧 “주의를 기울이는.” 그는 도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한다. 이것은 그저 베풀기만 하는 자선 행위가 아니다. 이 동사에는 가난이나 질병 등과 같은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을 포함한 사회 경제학의 기본 원칙이 내포되어 있다.

41:1 복이 있음이여.

참조 시 1:1 주석.

41:1 재앙의 날.

문자적으로 “악의 날.”

41: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이 약속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세우셨던 본래의 계획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한다(참조 신 28:1~14; 시 1:3; 37:3, 4, 11, 23~26, 37).

41:2 뜻.

히브리어 네페쉬(nepes∨). 참조 시 16:10; 27:12 주석.

41:3 저를 붙드시고.

그가 이제까지 병자들의 필요를 보살펴 왔기 때문에 대체로 그 역시 자신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선은 선으로 보답된다.

41:3 고쳐 펴시나이다.

히브리어 하파크(hapak), “전환하다”, “바꾸다.” 만일 이 말이 문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병자의 침구를 바꿀 때 그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뜻한다. 경험 많은 간호사의 가장 큰 특징은 환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그의 잠자리를 펴 주는 것이다. 만일 이 말이 비유적인 표현이라면, 시인은 지금 고통의 경감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 침상을 고통의 침상에서 회복의 침상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하나님은 어느 때라도 항상 고쳐 주실 것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고통의 경감과 위로는 약속하신다(참조 고전 10:13).

41:4 내가 말하기를.

히브리어에서 대명사 “나”가 문두에 위치한 것은 이 문장에서 이 단어가 강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지금 자신이 아플 때 한 말들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탄원한다.

41:4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시인은 병을 자신이 지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와 형벌로 여긴다(참조 시 38:3 주석).

41:4 내 영혼을.

히브리어 네페쉬(nepes∨), 단순히 “나를”(참조 시 16:10 주석). 육체적 질병 이외에도 다른 어떤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는 아니다.

41:5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그의 대적들은 그가 곧 죽을 것과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이 다 사라질 것을 예상하면서 흡족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41:6 나를 보러 와서는.

원수들 중 하나에 관한 언급이다. 그가 만일 환자를 방문하면 위선적인 말들을 늘어놓고, 환자에게 나쁜 짓을 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며, 병실을 나와서는 중상모략적인 말들을 퍼뜨린다. 이것은 실상은 가장 사악한 원수이면서 겉으론 친구인 체하는 사람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

41:6 거짓을 말하고.

곧 “헛된 것을 말하고.” 그의 호의는 모두 다 겉치레에 불과하다.

41:7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6절의 묘사가 계속되고 있다. 그 위선적인 방문객이 환자의 다른 원수들과 연합하여 환자의 비참한 상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최악의 상태로 빠지기를 소망한다.

41:7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절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거짓 소문을 내는 일과 위선적 행위가 어느 정도까지 이를 것인가!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은 실제로 그를 가장 사악한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참조 욥 22:5~10 등).

41:8 악한 병.

문자적으로 “벨리알(Belial)의 것” 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참조 삿 19:2; 시 18:4 주석). 도덕적 측면에서의 악을 일컫고 있는 듯하다.

41:8 눕고.

원수들은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에 관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해댄다. 그들은 그의 병을 그가 무서운 죄악을 범한 죄인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여긴다. 바로 이 일이 시인의 고통을 한층 가중시킨다.

41:9 내 떡을 먹던.

여기에 언급된 행동은 매우 수치스러운 행동이다(참조 삼하 9:10~13; 왕상 18:19). 이 구절은 유다에게 적용되었다(참조 요 13:18). 이 시의 일부분은 더욱 명백한 당시 상황에서의 한정적 적용 외에 또 다른 적용도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이 시 전체가 본래 예언적 성격을 지닌 시로 쓰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고대의 저술들에 대한 최선의 해석은 우선 그것들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 안에서 해석하고, 그 다음에 후에 영감받은 저자들이 그중 장차 일어날 사건들에 적용시킨 부분들에 한정해서만 추가적 적용을 하는 것이다(참조 신 18:15 주석).

41:9 나의 가까운 친구.

문자적으로 “나의 평화의 사람.” 이 시를 압살롬의 반역을 배경으로 다윗이 쓴 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절을 아히도벨에게 적용시킨다(삼하 5:31; 참조 시 55:12 주석).

41:9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적 표현을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을 차는 말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이것을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의미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께서 3년 동안이나 은총을 베푼 가룟 유다가 바로 이 같은 비열한 배은망덕을 저질렀다.

41:10 나를…일으키사.

원수들의 소망과는 정반대로 나의 병상에서부터(참조 8절).

41:11 내가 아나이다.

참조 시 20:6. 시인은 고통의 참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4절; 시 38:3 주석) 번영이나 건강도 하늘이 베푸는 특별한 은총의 표로 잘못 생각하였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이러한 복들을 내려주는 것은 사실이다(참조 약 1:17). 하지만 이 복들은 의인과 악인 구분 없이 모두에게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마 5:45) 하늘이 주는 이 같은 선물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가납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이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이 시 73편에 나오는 일련의 기술들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자신이 시련을 겪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는 삶과 성령의 확실한 증언이다(롬 8:16; 히 4:12).

41:12 나를(and as for me).

문자적으로 “그리고 나.” 이 문장은 마감이 되지 않은 문장이다. 혹은 다른 문법 형태로 완성된 문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인은 1인칭으로 시작한 후, 돌연히 자기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께로 주의를 돌린다.

41:12 완전.

(「제임스왕역」에는 “intergrity”[고결함]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완성이라는 측면에서의 “완전.” 이 절은 시인이 자신의 병에서 회복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41:12 영영히.

이 생각은 그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원수들의 소망(5절)과는 정반대이다.

41:13 여호와…하나님을…찬송할지로다.

시편 제1권을 마감하는 송영. 하지만 이 송영은 또한 2절의 말씀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송영이기도 하다. 시편 각 권을 끝맺는 다른 송영들을 참조하라.

41:13 아멘.

히브리어 아멘(’amen), “확실히.” 엄숙히 단언할 때 쓰이는 용어. 여기서는 반복을 통하여 그 중요성이 이중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 반복은 또한 이 시가 공중 예배에서 사용될 때 회중이 이에 응답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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