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5 시편 42 편 강해 The 158 Top Ans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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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시편 42:1-11 | 갈급함 위에 부어지는 은혜 |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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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 – 스펄젼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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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 - 스펄젼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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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월) “시편 42:1-11” / 작성: 강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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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

스펄젼의 시편 42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편에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음악의 대가에게 바쳐진 이 시편은, 그의 직무에 합당한 가치를 지닌 노래였으며, 또한 노래를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노래였다. 그것은 마스길 혹은 교훈적인 송시로 불리운다. 또한 그것은 깊은 체험이 담긴 표현들로 가득하므로, 천국으로의 여정 중에 다윗처럼 온갖 시련을 겪는 순례자들에게 교훈을 줄 의도로 저작된 것임에 분명하다. 너무도 자애로운 그리고 수많은 고초를 겪은 성도의 체험에 귀를 기울이면 항상 교훈을 얻기 마련이다.

노래하는 자들 중 정선된 무리인 고라의 자손들은 이 아름다운 시편을 부르는 특권을 얻었다. 그들의 조상인 고라와 그 일당 및 그 자녀들이 범죄로 인해 산 채로 땅에 삼키움을 당했을 때, 그들은 살아남았다(민 27:11). 그들은 주권적인 은혜 덕분에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말미암아 살아남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바는, 은총으로 인해 택하심을 받은 후에 그들은 너무도 감격에 겨운 나머지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칠 수 있도록 오로지 신성한 음악에만 몰두하였으리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처럼 구덩이로 떨어지는 상황으로부터 구출받은 우리는 이 시편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그분을 향한 갈망을 표출하는 모든 노래들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할 수 있다. 비록 다윗이 저자로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이 시편은 그의 손으로 지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너무도 다윗스러우며, 이새의 아들의 채취를 느끼게 하며, 또한 매 음절마다 다윗의 문체와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시편이 다윗의 저작임을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천로역정 제2부의 저자를 의심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 시편은 외적인 의식과 여호와 예배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전을 오래도록 사모하며 한숨 짓는 사람의 부르짖음이다. 동시에 그것은, 낙심에 빠진 채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기를 갈망하며 의혹과 두려움에 맞서 싸우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신의 기초를 끝까지 붙드는 신령한 성도의 음성이다. 여호와의 가족에 속한 자들 대부분은, 이 시편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바다를 항해해 왔다. 이 마스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달아날 때 지은 것인 듯하다.

구성

이 노래는 동일한 후렴구로 마감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1-5절과 6-11절.

[강 해]

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오랜 가뭄 끝에 기진맥진한 가련한 암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혹은 쫓기는 수사슴이 피 흐르는 옆구리를 씻기 위해, 사냥개들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강을 찾듯이, 핍박받아 지친 내 영혼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공적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다윗은 마음이 상했다. 그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았고, 영예를 탐내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급박하게 필요로 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단지 멋진 사치품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목마른 수사슴에게 있어서의 물과 같이 절대적인 필수품처럼 여겼다. 마치 광야에서 목이 몹시 마른 여행자가, 물병은 비고 샘을 찾아도 물이 남아 있지 않아 물을 마시지 못해 죽어가듯이, 그는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었다. 그의 영혼은, 그의 자아는, 그의 깊은 생명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기를 열망했다. 수사슴이 울부짖듯이 그의 영혼은 기도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임하시면 그는, 가련한 사슴이 마침내 갈증을 해소하고 온전히 만족을 누리듯이 흡족해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떠나면, 오래도록 달린 후에 숨을 헐떡이듯이 그의 마음이 허덕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또한 그의 온몸에 경련이 일어난다. 당신도 이러한 체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매우 쓰디쓴 경험이다. 여호와의 사랑의 빛 안에서 사는 삶 다음으로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을 소유할 때까지 불행해 하는 것이며 매 시간 그것을 갈급해 하는 것이다. 내가 ‘매 시간’이라고 표현했는가? 갈증은 지속적인 욕구이며 잊혀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갈망도 지속적인 것이다. 우리가 목마른 짐승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영혼에 유익한 일이다. 이 구절로부터, 우리의 간절한 갈망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끈질기며 열렬하게 구하는 자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2절. “내 영혼이.” 내 모든 성품, 나의 내밀한 자아.

“하나님.” 성전과 의식을 갈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했다.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갈증에 공감할 수가 없다.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그분이 살아 계시며 사람들에게 생수를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큰 열정으로 그분을 갈망한다. 살아 계시지 않는 하나님이란 단지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처럼 괴상한 신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나 생명과 빛과 사랑의 샘으로서 항상 살아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갈망의 대상이다. 황금, 영예, 그리고 쾌락 등이 무엇인가? 단지 죽은 우상들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갈망할 수는 없다.

“갈망하나니.” 이는 배고픔보다 더한 것이다. 배고픔은 일시적으로 덜해질 수도 있지만, 갈증은 끔찍하게 계속되며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한다. 최고의 선을 열렬히 갈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받은 표시가 아닌가?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성호를 숭앙하는 집회도 사랑한다. 신앙을 가장하는 모임은 헛되다. 다윗은 항상 자신의 집보다 여호와의 전을 더 사모했다. 그는 사적 예배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람들의 성향과는 달리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를 기피하지 않았다. 그 즐거운 모임에 다시 합류할 때가 언제인지를 얼마나 애절한 마음으로 묻고 있는가! 그는 자신의 갈망을 거듭하여 토로하고 있지 않은가! 시드는 꽃이 이슬을 갈망하듯이 혹은 거북이가 신음하며 자기 짝을 찾듯이, 그는 자신의 하나님 엘로힘(경배받기에 합당하신, 그리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갈망했다. 우리는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로 여겨야 한다. 공적 예배를 기뻐하는 것은 은혜받은 표시이다. 안타깝게도, 단지 목회자나 동료 신자들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히브리어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개념이 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그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 자신을 보여드릴 것이다. 이것은 갈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3절.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비겁한 자들의 입에서 잔인한 조롱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분명 그들은 신음하는 그를 혼자 가만히 둘 수도 있었다. 그는 필요한 만큼만 울 수도 있었다. 이미 슬픔의 눈물을 흘린 심령을 자극하여 더 많은 눈물을 솟구치게 하는 것은 악의에 찬 행동이다. 그들의 조롱이 얼마나 집요한지에,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간교하게 그 일을 꾸미는지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비난하는 말이 의인에게는 자신의 뼈를 깎는 듯이 느껴진다. 그로서는, 하나님께 비난의 화살을 날리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눈에 바늘을 꽂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본문은 시므이를 암시한 내용일 수 있다. 그는,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도피 중인 다윗을 이런 식으로 조롱했다. 그는 단호히 주장하기를, 다윗은 피흘린 사람이며 사울과 그 일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그에게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셨다고 했다. 악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 최악의 불행임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악의에 찬 마음으로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그들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되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는 성도들 가운데에도 계시사 그들을 구원하신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눈물은 입에는 짜지만 영혼의 건강에는 이롭다. 어떤 사람이 줄곧 눈물을 흘려 자신의 잔과 접시에 눈물이 가득 고일 때, 그의 심정은 참으로 진지하고 간절하다. 마치 기진맥진한 수사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듯이, 다윗의 눈에 눈물 방울이 반짝였다. 그는 식욕을 잃었고 눈물이 그의 유일한 음식이 되었다. 그는 다른 음식을 먹을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 안전 밸브를 열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보다 눈물마저 메마른 슬픔은 훨씬 더 끔찍하다. 하나님이 모독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흘린 다윗의 눈물은 “존귀한 이슬”이요 거룩한 물방울이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담아주신 것이었다.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절기를 지키는 요란한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고, 엄숙한 춤사위가 그의 눈에 어른거린다. 아마도 그는 법궤를 운반했던 일과 민족적인 대성일에 온 지파들이 함께 모였던 영광스러운 광경을 암시하려는 것 같다. 그의 현재 상태는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시온이 광야로, 흰 아마포를 입은 제사장들이 전투복으로 무장한 병사들로, 노래가 신성모독적인 조롱으로, 축제가 애곡으로, 그리고 여호와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그분의 부재로 말미암은 애가로 각각 탈바꿈했다.

오 하나님, 주께서 가까이 계시며,

모든 심령들이 찬양을 드리고,

누구보다 더 큰 복락이 내게 임했던,

그 행복한 날들을 생각하며 한숨짓나이다.

먼 이방 땅에서, 가톨릭의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서, 우리는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바와 같이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는 향수를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시온아, 시온아,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여, 언제 내가 다시 너를 보게 될꼬? 그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여, 내 어머니이자 내 고향이여, 언제 내가 그대의 찬송과 기도를 듣게 될꼬? 그 백성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언제 다시 뵈올꼬?” 다윗은 순례자들의 찬양에 각별히 애틋한 기억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 그것은 예배 중 가장 흥겨운 부분이며,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장 친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온 회중의 찬양을 부자연스러운 4중주나 세련된 합창단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악기로 찬양할 바에야 차라리 그걸로 기도하는 편이 더 낫다.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지난날의 기쁨에 대한 기억은 고통스러운 생각을 일깨웠다. 그는 경건한 무리와 함께 어울렸었다. 그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서 들뜬 기분에 사로잡혔고 성결한 기쁨을 맛보았다. 또한 함께 시온 언덕으로 올라갔던 그 무리는 그의 마음을 황홀하게 했다. 아름다운 행렬을 지어, 거룩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자주 노래를 부르면서, 그를 위시한 여호와의 백성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성소로, 평강과 거룩함이 거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나아갔었다. 이제 시편 기자는, 그 경건한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그 거룩한 장면을 마음속에 그리며 경건한 행렬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되돌아볼 때, 그의 마음은 물처럼 녹아 내렸다.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시고 대적들이 격노하는 상황에서는, 자그마한 재난이 닥쳐도 가장 강건한 심령을 낙담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 가치도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토록 음울한 생각에 사로잡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것은 쓸모 없는 짓이다. 자신의 마음을 여호와 앞에 털어놓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은가! 마음속에 의문을 일으켜 위로를 받으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죄수가, 자신을 태운 호송차가 한적한 곳에다 자신을 내려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시편 기자는 마치 자신이 두 사람인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그의 믿음이 그의 두려움과 더불어 변론하며, 그의 소망이 그의 슬픔과 논쟁을 벌인다. 이 현재의 곤경들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가? 내 대적들의 기쁨은 공허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엄숙한 절기에 참석하지 못하는 내 신세는 영구히 회복되지 않을 것인가? 이 깊은 낙심은, 이 불신에 찬 좌절은, 이 소심하고 우울한 마음은 무엇 때문에 생겼을까? 트랩(Trapp)이 말한 바와 같이, “다윗은 자신을 꾸짖어 쓰레기 더미에서 나오게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모든 낙심하는 자들의 본보기이다. 우리의 슬픔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그 슬픔을 치유하는 최선의 치료법인 경우가 종종 있다. 스스로에 대한 무지는 축복이 아니다. 본문의 경우에 그것은 불행이다. 무지의 안개는 두려움을 더욱 가중시킨다. 보다 명쾌한 판단은 엄청난 두려움을 점차 줄어들게 한다.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나의 평안이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가? 설령 내가 공적으로 안식을 지킬 수 없다고 해도, 어찌하여 마음속의 안식일마저 거부해야 하는가? 어찌하여 나는 요동하는 바다처럼 혼란에 휩싸이며, 어찌하여 내 생각은 떠들썩한 무리들처럼 번잡스러운가? 이렇듯 철저한 낙심 상태를 정당화시켜줄 만한 원인을 과연 댈 수 있을까? 내 심령이여, 기력을 회복하라! 너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가? 남자답게 처신하라. 그리하면 낙담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며, 불안이 변하여 평온해질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설령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모든 재앙이 쏟아져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 바닥에는 소망이 들어 있다. 비록 물결이 포효하고 날뛸지라도, 은혜가 그 물결 위에 떠 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따라서 그분의 은혜는 흔들림 없는 소망의 근거이다. 모든 것이 캄캄해도 날은 밝아올 것이며, 소망의 눈 속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소망의 등잔은 외부에서 공급되는 기름에 의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밀하신 임재로 인해 그 불이 밝혀진다. 영혼을 보존해 주는 것은 바로 그분의 임재이다.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구원은 하나님의 미소띤 얼굴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는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드실 것이다. 다윗의 주된 소망과 바람은 하나님의 미소를 의뢰하는 것이었음에 주목하라. 그는 그분의 얼굴 뵙기를 소망하여 간절히 찾는다. 그분의 얼굴은 쇠약해진 그의 기력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를 비웃는 대적들을 멸시하실 것이고, 또한 기억 속에 어른거리는 거룩하고 행복한 날들의 기쁨을 그에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 구절은, 바울과 실라의 찬송처럼, 쇠사슬을 풀어주며 감옥 벽을 뒤흔든다. 음울한 때에 이토록 당당한 시구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코 승리를 거둘 것이다. 소망의 정원에는, 장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월계수와 기쁨의 장미와 평강의 백합화가 자라고 있다.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나의 한숨은 노래로 바뀌고, 나의 애가는 승리의 개선가로 변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 감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랑 자체를 잃은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 가슴에서 반짝이지는 않아도 보석은 거기에 있다. 약속된 은총이 비록 지금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소망은 그 실현을 기대한다.

6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8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6절.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여기서 이 노래는 다시금 고통스러운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앞 절에서 감미로운 소망과 기쁨으로 내용이 일단락지어졌거니와, 이제 두번째의 소망스러운 마감을 위한 내용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시편 기자의 낙담 상태가 지속된 듯하며, 낙심으로 인한 경련이 재발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다시 수금을 타면서 기력을 얻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수금을 연주하여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을 내쫓은 경험이 있었다. 이 두번째 노래는 첫번째에 비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느낌으로 시작된다. 시편 기자 역시 더욱 침착한 모습이다. 외적인 갈망의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시적인 헐떡거림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모든 슬픔이 내면에서 억제되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 속에 가라앉아 있다. 우리의 생각이 위로 향하지 않고 안으로만 침잠할 때, 낙심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자아를 통해 위안을 찾아야 한다면, 우리는 초라한 여물밖에 얻을 것이 없다. 우리의 변덕스러운 마음속에는 굳건한 위안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느끼는 바를 여호와께 고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고백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더욱 좋다. 다윗은 마치 병든 아이가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야 한다.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나의 평안이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가? 설령 내가 공적으로 안식을 지킬 수 없다고 해도, 어찌하여 마음속의 안식일마저 거부해야 하는가? 어찌하여 나는 요동하는 바다처럼 혼란에 휩싸이며, 어찌하여 내 생각은 떠들썩한 무리들처럼 번잡스러운가? 이렇듯 철저한 낙심 상태를 정당화시켜줄 만한 원인을 과연 댈 수 있을까? 내 심령이여, 기력을 회복하라! 너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가? 남자답게 처신하라. 그리하면 낙담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며, 불안이 변하여 평온해질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설령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모든 재앙이 쏟아져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 바닥에는 소망이 들어 있다. 비록 물결이 포효하고 날뛸지라도, 은혜가 그 물결 위에 떠 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따라서 그분의 은혜는 흔들림 없는 소망의 근거이다. 모든 것이 캄캄해도 날은 밝아올 것이며, 소망의 눈 속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소망의 등잔은 외부에서 공급되는 기름에 의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밀하신 임재로 인해 그 불이 밝혀진다. 영혼을 보존해 주는 것은 바로 그분의 임재이다.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구원은 하나님의 미소띤 얼굴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는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드실 것이다. 다윗의 주된 소망과 바람은 하나님의 미소를 의뢰하는 것이었음에 주목하라. 그는 그분의 얼굴 뵙기를 소망하여 간절히 찾는다. 그분의 얼굴은 쇠약해진 그의 기력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를 비웃는 대적들을 멸시하실 것이고, 또한 기억 속에 어른거리는 거룩하고 행복한 날들의 기쁨을 그에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 구절은, 바울과 실라의 찬송처럼, 쇠사슬을 풀어주며 감옥 벽을 뒤흔든다. 음울한 때에 이토록 당당한 시구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코 승리를 거둘 것이다. 소망의 정원에는, 장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월계수와 기쁨의 장미와 평강의 백합화가 자라고 있다.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나의 한숨은 노래로 바뀌고, 나의 애가는 승리의 개선가로 변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 감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랑 자체를 잃은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 가슴에서 반짝이지는 않아도 보석은 거기에 있다. 약속된 은총이 비록 지금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소망은 그 실현을 기대한다.

6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8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6절.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여기서 이 노래는 다시금 고통스러운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앞 절에서 감미로운 소망과 기쁨으로 내용이 일단락지어졌거니와, 이제 두번째의 소망스러운 마감을 위한 내용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시편 기자의 낙담 상태가 지속된 듯하며, 낙심으로 인한 경련이 재발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다시 수금을 타면서 기력을 얻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수금을 연주하여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을 내쫓은 경험이 있었다. 이 두번째 노래는 첫번째에 비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느낌으로 시작된다. 시편 기자 역시 더욱 침착한 모습이다. 외적인 갈망의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시적인 헐떡거림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모든 슬픔이 내면에서 억제되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 속에 가라앉아 있다. 우리의 생각이 위로 향하지 않고 안으로만 침잠할 때, 낙심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자아를 통해 위안을 찾아야 한다면, 우리는 초라한 여물밖에 얻을 것이 없다. 우리의 변덕스러운 마음속에는 굳건한 위안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느끼는 바를 여호와께 고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고백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더욱 좋다. 다윗은 마치 병든 아이가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야 한다.

“내가······주를 기억하나이다.” 우리 하나님께로 달아나는 것이 좋다. 거기에 든든한 뭍이 있다. 우리가 낙심으로 인해 주님처럼 확실한 반석에 피신하게 된다면, 그 낙심은 오히려 축복이다!

“미살산에서.” 그는 강변과 언덕 위에서 나누었던 친교를 회상하며, 특히 나직한 미살산에서의 아름다웠던 시간들을 회상한다. 거기서 감미로운 사랑의 대화를 나누었고 가장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졌다. 천상의 대화를 나누었던 소중한 기억들을 간직해 두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다. 여호와께서 버림받은 자를 더디 회복시키실 때, 그리고 우리 영혼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괴로울 때, 우리는 언젠가 그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할 수 있다. ‘지난날에 베푸신 그분의 사랑’은 낙심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강심제 역할을 해왔다. 마치 부드러운 입김처럼 그것은 연기나는 아마포에 불길을 지피고, 부러진 갈대를 싸매어 세운다. 아골 골짜기 속에서도 주님은 소망의 문이 되신다. 좋은 날들이 지나갔지만, 주께서는 빛을 남기사 우리의 음울한 현실을 위로하신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시간과 장소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요단강을 실로암처럼 신성하게 여겼고, 헤르몬을 시온처럼 거룩하게 여겼으며, 또한 그다지 주목받지 않던 미살산을 예루살렘 주위의 산들처럼 영광스러운 곳으로 여겼다.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는 자는 천상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내게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어느 곳이나 나의 고국이다.

내가 평온하고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어느 곳에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계시지 않은 곳에 내던져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나 하나님을 찾을 수 있으니,

그 어디에도 외딴 곳이 없다.

7절.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께서 내게 심하게 대하시니, 마치 모든 피조물들이 나를 공격하는 듯합니다. 하늘과 땅과 지옥이 함께 모여 나의 평안을 해칠 무서운 음모를 꾸미느라고 서로를 부추깁니다. 마치 물기둥이 치솟았다가 떨어져 요란한 굉음을 내듯이, 다윗이 보기에는 하늘과 땅이 연합하여 그의 주위로 폭풍우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에게 닥친 재난은 끊임이 없고 압도적이었다. 거대한 물결이 연이어 덮치며, 큰 파도소리가 또 다른 파도소리를 불렀다. 육체적인 고통이 정신적인 공포를 야기시켰고, 사탄의 암시가 의혹스러운 예감과 맞장구쳤으며, 외적인 시련이 내적인 고뇌와 어우러져 천둥소리를 내었다. 그의 영혼은 곤경의 대홍수로 인해 익사하는 듯했고, 그 홍수 위로는 여호와의 섭리가 극도의 공포를 야기시키는 무서운 위엄 가운데서 물기둥처럼 움직였다. 곤경에 처한 그는 마치 격노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작은 범선 같았고, 파도에 휩쓸리는 돛대를 간신히 붙들고서 표류하는 선원과 같았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다윗은 세상의 모든 곤경이 자신에게 닥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과장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모든 풍파를 감수하신 분은 오직 주 예수뿐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사랑으로 인하여 그분의 자녀에게 슬픔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도 있다. 슬픔에 잠긴 사람이 자신의 경우를 과장되게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두려워하는 바 그대로 우리를 다루지는 않으신다. 그것이 곧 은총이다. 그러면 어떤 곤경이 닥칠 수 있는가? 대서양의 큰 파도가 끊임없이 머리 위로 밀어닥치고, 물기둥은 점점 가까워지며, 기진맥진하여 헤엄치는 자의 주위로 바다가 온통 포효하는 것과 같은 곤경이다. 천국의 상속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묘사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총의 유아 단계에 있는 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깊은 체험이지만, 거대한 곤경의 바다에서 자신의 본분을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물결과 파도가 여호와의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위로가 된다. 다윗은 이르기를, “주의 파도와 물결이” 모두 그분에 의해 보내지고, 그분의 지시에 따르며, 그분의 계획을 성취한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더욱 인내하게 된다.

8절.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확실하고 은밀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인생이라고 하는 거친 바다에서 생명줄 역할을 한다. 낮이 갑자기 캄캄한 밤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택함받은 성도의 몫으로서 오래전에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사랑은 주권적인 명령에 따라 그들에게 제공될 것이다. 은혜의 상속자에게 있어서는, 여호와께 버림받는 날이 단 하루도 닥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며, 또한 그는 주권자의 권세로써 명하사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 은총을 남겨 두신다.

“밤에는.” 낮이든 밤이든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으로 환하게 비췰 것이며, 그 어떤 시련의 압박도 그 광채를 막지 못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낮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어떤 때이든간에, 그분의 이스라엘은 항상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 찬송이 내게 있어.” 받은 바 축복으로 인한 찬양의 노래는 밤의 암울한 분위기를 활기차게 변화시킬 것이다. 이보다 더 감미로운 음악은 없다. 우리가 곤경 가운데 받은 바 은총을 인하여 여호와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믿음은 영혼의 든든한 지주이다. 곤경이 우리의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우리의 노래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촛불을 곧 다시 밝힐 것이다.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기도는 찬양과 결합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기도와 찬양으로 그분과 함께하는 데에 그 생명을 바치며, 또한 그분 안에서 우리의 생명은 완전해질 것이다. 우리가 한숨지을 때나 노래할 때나 언제든지 영광스러우신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가장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도 소망을 지닐 수 있는 근거가 된다.

9절.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믿음을 지닌 자는 하나님이 불쾌해 하시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여쭈어 보아도 된다. 심지어는 그분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그 약속이 분명하게 성취되지 않은 데 대한 이유를 그분께 여쭈어도 된다. 만일 여호와께서 진정 우리의 피난처시라면, 피할 곳이 없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나이까?”라고 여쭐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잡은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여호와를 늘 “내” 반석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분만 의지해야 하며, 자신의 관심사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아브라함의 항변을 겸손하게 들어주셨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가혹하신 손길에 대한 이유를 여쭙도록 허용하신다. 분명 그는 눈물 자국으로 지저분한 종들의 얼굴을 보는 것을 기뻐하실 수가 없다. 그들이 대적들에 의해 잔혹스러운 공격을 당하는 것을, 그분이 흡족해 하실 리가 없다. 그분은 그들에 대한 사탄의 억압을 즐기실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분이 그들을 대적들에 의해 조롱당하도록 방치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반석처럼 굳건하고 불변하시는, 강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 대해 반석처럼 냉담하실 수가 있는가? 겸손하게 토로하는 이러한 물음들은 영혼에 안도감을 제공해 준다. 슬픔의 이유를 알면 그것을 피하는 법을 부분적으로나마 알게 되며, 혹은 적어도 그것을 인내하는 법을 알게 된다. 주의깊은 분별이 결여되면, 역경에 부딪힐 때 종종 그것을 실제보다 더 절망적인 무게로 받아들이게 된다. 손발이 절단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하지만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술할 필요가 있었을 때 그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 마음은 매우 기쁘다. 마찬가지로, 시련이 닥칠 때, 그것을 보내시는 여호와의 계획을 조금이나마 깨달으면 그 시련을 감당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10절.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잔인한 조롱은 살보다 더 깊은 곳까지 찌른다. 그것은 마치 갈비뼈 사이를 관통하여 심장을 찌르는 뾰족한 검처럼 영혼에까지 이른다. 설령 비난이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가며, 이로 인한 고통은 참기 어렵다. 혀는 뼈를 깎으며, 혀로 인한 상처는 치유되기 힘들다.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이는 가장 잔혹하게 찌르는 독설로서, 여호와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종의 성품을 함께 모독하는 것이다. 다윗의 대적들이 지닌 악의가 바로 그러했다. 그들은 ‘매일’, ‘반복적으로’, 그리고 ‘오래도록’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발뒤꿈치에서 똥개 같은 작자들이 계속 짖어대는 것만으로도 다윗을 미칠 지경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만일 그가 기도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대적들의 핍박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자신의 슬픔을 살피면서, 그는 낙망할 근거가 충분하지 않음을 자각한다. 자세히 들여다본 결과, 그의 두려움은 애매모호한 상태로 가리워져 있던 때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은 듯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영혼의 닻을 굳건히 하라.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그는 사랑이시다. 따라서 소망을 지닐 여지와 이유가 있다.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는 1절에 수록된 내용처럼 희망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덧붙여진 것은, 시편 기자의 확신이 점점 더 굳건해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가 당당하게 답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이 바로 여기에 계시다. 아무리 너희들이 비방과 조롱을 퍼부어도 나는 그분을 나의 주로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이 너희 손에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에 의해 싸움은 마감되며, 시편 기자는 확신을 지니고서 승리를 기대한다. 만일 하나님을 입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대한다면, 가장 슬픈 얼굴도 밝아질 것이다.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그분을 내가 찬양하리라.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의지할 때, 내 얼굴에 생기가 돈다.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고라 자손.” ‘고라 자손’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어떤 견해에 의하면, 다윗 시대에 ‘고라’라는 이름을 지닌 자가 현존했고 고라 자손이란 바로 그의 자손을 가리킨다고 한다. 머지(Mudge)와 다른 이들은 생각하기를, 고라 자손이란 고라에 의해 창립된 혹은 그의 주재를 받았던 악단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모세 당시에 비참한 죽음을 당했던 고라의 후손들 중 살아남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 고라는 자신을 따랐던 250명의 족장들과 함께 땅 속에 삼키움을 당했던 자이다.

민수기 26:11에는,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는 언급이 나온다. 그들은 주어진 경고를 받아들여 그 악인들의 장막을 떠났었다(민 26:24, 26). ‘고라’라는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딴 ‘고라 자손’이라는 명칭이 성경에서 언급될 때, 그 이름에 대해 상당히 의혹을 느끼게 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대상 1:35; 2:43; 6:22, 54; 9:19; 26:1; 대하 20:19 등 참조). 이러한 모든 견해들 중, 이들이 모세 당시의 반역자 고라의 후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더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에인즈워스(Ainsworth)와 길(Gill)을 위시한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한다. 멸망당한 고라는 레위인이었다. 그들의 기원이 어떠하든지간에, 분명한 점은 ‘고라 자손’이 레위 가문의 노래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성한 노래를 이들에게 맡긴 것은 너무도 적절한 일이었다. -윌리엄 플러머(William S. Plumer).

머리말. “고라 자손.” ‘고라’는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여 반란을 주도했던 레위인이다(민 16장). 그의 자손은, 적어도 역대상 12:6에 언급된 ‘고라 사람들’과 동일시될 수 있다면, 다윗 시대에 유력한 레위 가문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예전에 전투에 참가한 주교들이 그러했듯이, 제사장 예복을 벗어던지고 군복으로 무장하기도 했던 것 같으며, 그들의 손은 하프를 탈 뿐만 아니라 칼을 들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글락에서 고라 사람들은 다윗을 수장으로 받들었던 군대의 일부를 구성했다. 그들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았다(대상 12:8). 역대상 9:17-19에 의하면 고라 자손은 다윗 당시에 성막 문들을 지켰고, 훨씬 더 이전인 모세 시대에는 레위인들의 진영으로 통하는 입구를 지켰다. 역대상 26:1-19에서, 우리는 고라 족속에 속한 두 가문이 므라리 자손과 더불어 성전 문지기 역할을 맡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시편 84:10은 아마도 이러한 직무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고라 사람들은 음악가들 혹은 노래하는 자들로 유명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역대상 6:16-33에서는, 당시의 저명한 음악가 3인 중 한 사람이었던 헤만이 고라 자손으로 언급된다(비교, 대상 25장). 그 가문의 음악적 명성은 여호사밧 시대까지 지속되었다(대하 20:19). -스튜어트 퍼론(J. J. Stewart Perowne).

머리말. “고라 자손.” 중세의 저자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세우심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본문을 언급한다.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던 자의 후손이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의 교회에 유산으로 물려질 귀한 시편들을 노래하리라고 그 누가 생각했겠는가? -닐(J. M. Neale).

1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의 시가에 자주 등장하는 정경과 마주한다. 가젤은 참으로 우아한 짐승이며, 그 뛰는 모습 또한 우아하다······세속 작가들은 가젤을 사슴이나 노루 따위의 다른 이름으로 종종 언급한다······나는 중부 시리아의 방대한 광야에서 시내를 찾으러 몰려다니는 목마른 사슴 떼들을 본 적이 있다. 그 사슴들은 너무도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까닭에 어지간히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서는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톰슨(W. M. Thomson).

1절. 술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낙으로 삼는 주정뱅이들로서는, 경건한 자가 하나님의 전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더 큰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에 선지자를 통해 그러한 기쁨을 주기로 약속하셨다:”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생각건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 4:2)고 기꺼이 서로 화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경건한 사람이 그러한 집회에 참석하면 ‘거룩한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성결한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 거하기를 그 얼마나 사모했던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만일 그가 잠시 동안이라도 그곳과 멀어진다면, 그의 영혼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물을 갈급해 하듯이 그곳을 사모하고 갈망하여 기진맥진해 할 지경이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수심에 잠긴 가련한 포로민들은 하나님의 전을 최우선적으로 기억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시 137:5). 말하자면, 그들은 그 기억을 가장 주된 기쁨으로 여겼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6절).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의 전과 비교하여 관심을 기울일 만할 장소가 이 세상에 단 한 곳도 없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애 전체를 그 전에서 보내고 싶어하였다(시 27:4). -자카리 보간(Zachary Bogan).

1절. 그의 영혼은 의식 준수를 통해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기를 강렬하게 사모한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여, 다윗이 마치 사랑하는 자를 떠나 있는 연인들처럼 얼마나 간절한 애정을 토로하고 있는지를 언급한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불만과 한숨을 토로하며 애정어린 탄성을 발한다. 그들은 나무를 마주칠 때마다 거기에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새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항상 그분을 생각하면서 한숨지으며, 그분을 그리워하고, 그분에 관해 말하며, 또한 (만일 가능하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다 주 예수의 이름을 새기기를 원한다. 이제 사울을 피해 달아나는 추방자 신세인 다윗을 보라. 그가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보라. 그는 테미스토클레스(그리스 아테네의 장군이자 정치가-역자 주)나 카밀루스 등과 같이 처신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조국의 배은망덕함과 대적들의 악의와 그리고 자기 자신의 불행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불평하는 대신에 오직 하나님만을 간절히 사모한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성소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의식에 참예할 수 없고, 다른 모든 장소들이 그에게는 단지 게달의 장막처럼 보인다. 그는 성전으로부터 추방당했고,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는 2절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도 추방당했다고 생각한다. 이 시편 전체는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그는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다 온통 마음을 쏟는다. -나다나엘 컬버웰(Nathanael Culverwel, Panting Soul, 1652).

1, 2, 3절. 이 구절들은 시편 제2권에서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프라이(Fry)는 이 구절들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사슴이 샘을 갈구하듯이,

오 엘로힘이여, 내 영혼은 주를 갈구하나이다.

내 영혼이 엘로힘 곧 살아 계시는 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언제 가서 엘로힘의 얼굴을 뵈올꼬?

사람들이 줄곧 내게,

“네 엘로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 때에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양식이 되었나이다.

2절. “내 영혼이······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어떤 의무를 이행하든간에 그리스도를 배제시키지 않도록 유의하라. 어떤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 그리스도에 관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무엇인가를 한 움큼뿐만 아니라 한아름 가득 가슴에 품기 전까지는(연로한 시미언처럼-눅 2:28) 그것에 개의치 말라. 시미언은 베들레헴의 아름답고 복되신 아기에게 성심성의껏 대했다. 사실 당신은 하늘과 더불어 교류해야 하며, 어떤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 그리스도와 교류해야 한다. 그럴 때 소위 ‘하나님의 임재’가 동반되며 당신이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출 23:17; 시 42:2). 그렇다면 당신의 의무는 당신을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인도하는 다리나 배와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순교자 성 브래드퍼드(Bradford)는 이르기를, 자신의 마음이 죄로 인해 상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백’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마음이 아름다운 축복에 감동되고서야 비로소 ‘탄원’을 드릴 수 있었고, 자신의 영혼이 곧바로 찬양을 발하고 나서야 비로소 ‘감사’할 수 있었으며, 또한 자신의 심령이 어떤 의무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무’를 이행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베르나르(Bernard)는, ‘저는 주님과 함께 있게 되기까지 주님에 대한 의무를 결코 저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르기를, 자신은 툴리(Tully)의 세련된 연설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은혜받은 영혼은 공허한 의무를 좋아하지 않는다. 수사학적인 미사여구들은, 혹은 기도나 설교에 있어 감동 없는 표현들은 참된 양식이 아니라 단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노상에서 (이행할 의무와 관련하여) 당신과 더불어 말씀하신다면 당신의 마음속은 뜨거워질 것이다(눅 24:16, 32). -크리스토퍼 네스(Christopher Ness, Chrystal Mirrour, 1679).

2절. “생존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생존하시는 하나님”으로 지칭된다. 첫째, ‘기원적 측면에서.’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스스로 자신 안에 생명을 지니신 분이며, 모든 피조물들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둘째로, ‘활동적 측면에서.’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혹은 영원한 것이든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다. 셋째로, 하나님은 ‘그 특성의 측면에서,’ 그리고 모든 거짓 신들에 반대된다는 측면에서 “생존하시는 하나님”으로 지칭되신다. -토머스 호턴(Thomas Horton).

2절 하반절. 악인은 진지하게,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설령 그렇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마치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그리스도께 말했던 귀신들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도둑이나 어떤 범인에게, 재판관 앞에 기꺼이 나아가고 싶은지 물어보라.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재판관이라는 존재가 아예 없기를 바랄 것이다. 세상적인 사람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감추어지기를 바란다. -토머스 호턴.

2절.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우리가 교회에 있을 때, 무엇을 보려고 거기로 갔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종교 그림자를 보기 위함인가? 기독교의 외적인 형식을 보기 위함인가? 근사한 연설을 듣기 위함인가? 외관상의 헌신을 보기 위함인가?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광야로 가는 것이 더 지혜롭고 순수할 것이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왔던 헬라인들처럼, 우리도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요 12:21) 하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압살롬처럼, “(만일 왕의 얼굴을 뵐 수 없다면)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삼하 14:32)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지도 뵙지도 않는다면, 거기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이작 왓츠(Isaac Watts, D.D., 1674-1748).

2절. 어린아이에게 장난감 따위를 주어 아이의 관심을 그리로 쏠리게 하려 해도, 그 아이는 얼마가지 않아서 싫증을 내고는 엄마 품으로 달려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교단에서 세련된 라틴어와 헬라어 문장을 구사하거나 입담 좋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굶주린 영혼을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신실한 말씀이라고 하는 우유이다. -올리버 헤이우드(Oliver Heywood).

2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여호와여, 주의 전으로부터 추방당해 있는 동안

나는 남몰래 비통해 하였나이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서원을 올리며,

또 주의 거룩하신 말씀을 들으리오?

내가 생각건대, 육체에 속박되어 있는 동안에는,

내 영혼이 신음할 것입니다.

내가 어느 때에 천상으로 날아가

주의 보좌 앞에 서리오?

이 땅에서는 내가 주님 뵙기를 사모하며,

교회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나이다.

하지만 천상에서는 내가 그분의 영광을 알며

그분을 면전에서 뵈올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죄가 나를 공격해 올지라도,

나는 그분의 발 앞에 경배하기를 원하나이다.

하지만 그분의 보좌 가까이로 올리움을 받은 성도는

그 어떤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분의 궁정에서 그분을 만나

천상의 사랑을 맛보며 기뻐하지만,

그분의 임재가 너무나 짧고

나의 일생도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이 빛을 발하시면 나는 기쁨으로 충만하지만,

그분이 모습을 감추시면 모든 것이 고통뿐입니다.

그분이 항상 내게 시야를 고정시키시며,

다시는 떠나지 않으실 때가 어느 때이리오?

-아이작 왓츠의 설교 중에서.

3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편 기자는 극도의 슬픔 때문에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존 개즈비(John Gadsby).

3절. “사람들이······나더러 하는 말이.” 사람들은 나에 관해서 말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더러 말했다. 그들이 그의 면전에다 대고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내버림당한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는 투였다. 험담이란 매우 비열한 짓이다. 그런가 하면 노골적인 비난은 더욱 뻔뻔스럽고 파렴치하며 또한 건방진 것이다. 본문에 언급된 다윗의 대적들이 그에게 가했던 비방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토머스 호턴.

3절.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도 사람인 한 비난에 대해 참기 어려워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는 식의 신앙에 대한 비난을 참기 어려워한다. 이렇게 비난하는 자들은, 아예 하나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혹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문을 표할 정도로 무신론의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사실상 그들에게는 무신론자들보다 나은 부분이 거의 없지만. 오히려 그들은 그의 유별남을 비난하거나 책망하기라도 하듯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말한다.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냐? 너 혼자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느냐? 너 혼자만 하나님께 나아가겠느냐?” 흔히 악인들은 뛰어난 신앙인들을 이런 식으로 비난하며, 후자가 곤경에 처했을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너의 고백이 이제 어떻게 되었느냐? 그토록 의기양양해 하던 네가 이제 어찌 된 일이냐? 네가 그토록 자랑했던 하나님이 어떻게 되셨는가? 너는 네 하나님 안에서 그다지도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마치 그분이 오직 너만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느냐?”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해 악인들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독기어린 성향이며, 어떤 사람의 신앙적인 부분을 비난하는 저주받은 성향이다.

그들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들의 의도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말보다 더 악한 것이다. 그것인즉,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확신을 뒤흔들려는 것이며, 그들의 질책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이 그토록 자극되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의도 때문이었다. 마귀는, 어떤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 한 그를 괴롭히려는 어떠한 노력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이간질한다. 그는,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마귀의 모든 시도는 헛되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뒤흔들려는 것이 그의 의도이다. 한편, 마귀는 교회의 머리이신 복되신 우리 구주를 시험하러 갔을 때, 그분께도 그런 식으로 대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그는 “만일”이라는 가정으로 다가가서 그분의 아들 되심에 대한 확신을 뒤흔들고자 했다. 마귀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었기 때문에 분리의 영이 되었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를 그분 자신의 아들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는 조롱 속에 그러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즉,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마치 하나님이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너는 하나님을 섬기느라고 큰 고통을 당해 왔다. 하나님이 이제 너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3절. 불신자의 조롱과 비난은 이미 낙심한 자의 믿음을 심하게 뒤흔드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대적들이 그분을 모독하는 말을 들을 때 각별한 괴로움을 느낀다. -헨리 마치(Henry March, Sabbaths at Home, 1823).

3절.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오, 슬프도다,

“이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며,

기대했던 내일 역시 오늘처럼 암울할 뿐이다.

하지만 여호와를 모독하는 말로 인해,

더 심한 고통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내 영혼이 이토록 큰 번뇌에 사로잡히거나

비통함과 수치로 인해 전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오, 자비로우신 하나님,

저를 도우사 대답하게 하소서.

“그분이 여기 계시다,

비록 대적들이 나를 공격할지라도,

그분의 펴신 팔이 가까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라고.

제가 믿음의 방패를 붙들고 있는 동안,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여호와여, 임하사, 당신을 영화롭게 하소서.

주의 영광을 위해 나를 도우소서.

-헨리 마치.

4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곤경에 처한 자에게는, 행복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더 심한 고통으로 작용한다. 다윗이 예전의 즐거웠던 일들을 기억했을 때 그의 눈에는 새로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련한 영혼은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을 때가 있었으며, 또한 그분을 나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한때 즐거움의 근원이셨던 하나님을 잃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운 일이다. 내가 그분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편안해질 수 있는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도할 용기나 소망이 없으며 기도해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다. 나는 더 이상 그분을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다. 내가 성경을 읽고서 약속들을 확인하며 또한 가나안 땅을 나 자신의 기업으로 조망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정죄하는 내용과 마주칠까봐 두려워서 성경 말씀을 감히 읽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안식일이 내게 천상의 날들 중 하나처럼 여겨졌지만, 이제는 그날도 나머지 날들과 마찬가지로 서글프고 비통한 날이다.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즐거워하며 그분의 그늘에 앉았다(아 2:3).

나는 그분의 은총을 누렸다. 하지만 이제 내 영혼은 마치 아라비아 사막 같으며 나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그을렸다. 나는 참으로 높은 곳으로부터 추락했다. 한때 나는 천국에 들어가며 구원을 얻기에 매우 합당한 존재였으나, 이제는 그렇게 하기에 너무도 미흡한 상태이다. 한때 나는 여호와의 궁정에서 번성했지만, 이제는 나의 모든 과실이 시들어버렸다. 한때는 그분의 이슬이 밤새도록 내 가지 위에 내렸지만, 이제는 내가 마치 길보아의 산들 같으며, 내게는 비가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내가 천상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더라면, 그분을 잃었다고 해서 지금처럼 끔찍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욥 29:2, 3). -티모시 로저스(Timothy Rogers).

4절 상반절. 여호와께 예배드렸던 기억은 너무도 복된 것이기에, 그 기억만으로도 절망에 빠진 영혼을 구할 수 있다. -랑게(J. P. Lange, Commentary).

4절.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쏟아붓는다. -토머스 브룩스(Thomas Brooks).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수많은 간구자들이 영적, 육적 도움을 얻고자 그분의 성전 문에 몰려드는 것을 흡족하게 여기신다. 수많은 소작인들이 우리의 위대하신 지주께 함께 몰려가서 그분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들로 인해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것은 그분을 참으로 영예롭게 하는 일이다. 수많은 황금 나팔에서 울리는 소리는 그 얼마나 요란하며 사랑스러운가! 좋으신 여호와여, 그 메아리가 하늘에 울려퍼지나이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능숙한 솜씨로 훌륭한 악기들을 연주하여 찬양할 때, 그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밖에 없다.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4절. 다윗이 사적으로는 예배드릴 수 있었지만 공적 의식에 참예할 수 없음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슬퍼했다는 사실과 또한 공적 의식에 참여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사실을 생각해 보라. 그가 하나님의 성소로부터 멀어짐으로 인해 겪었던 슬픔에 주목해 보라.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말하자면, 그가 슬픔에 압도당했다는 뜻이며, 신앙 집회에 참석하면서 누렸던 예전의 행복과 현재 상태를 비교할 때 죽고 싶다는 뜻이다. “쏟아부어진다”(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상하는도다”로 번역되었다-역자 주)는 말은 물이나 다른 액체에 적용되며, 성경에서는 풍성함을 가리킨다(욜 2:28). 내가 예전의 은총들을 기억하고 현재의 곤경을 생각할 때, 내 생명은 마치 땅에 엎질러져서 다시 담을 수 없게 된 물처럼 쏟아지려고 한다······설사 그가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들, 자녀들, 땅, 자유, 혹은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고 해도, 그것이 공적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만큼 그의 마음을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인한 슬픔이 컸던 것과 같이, 그 의식에 참예하고자 하는 갈망은 너무도 간절했다. 성막 의식에 참예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기도를 드렸던가!(시 43:3, 4; 27:4, 8).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간청하는 유일하고도 으뜸가는 간구 대상이다. -헨리 스미스(Henry Smith).

4절. 어떤 사람의 성향은 어떤 기억을 애틋해 하는지에 의해 현격하게 드러난다. -헨리 마치.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비록 개인적인 기도가 담대한 계획이긴 하지만

공적 예배는 더 많은 약속과 사랑을 보장한다.

사랑은 마음에 무게를 더해 주며

눈으로 표적을 보게 한다.

우리 모두는 단지 냉정한 고소자들일 뿐이니,

가장 따스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예닐곱 사람을 떠나,

다수의 무리와 더불어 기도하라. 최선의 기도는

천상에서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The Temple).

5절. 11절과 시편 43:5의 주해를 참조하라.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자기 친구에게 조언하기를, 어떤 곤경에 직면할 때 곧바로 엎드려 이 구절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이 내용과 반대되는 마음을 품음으로써뿐만 아니라 동일한 마음을 품음으로써도 치유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두 악기를 같은 음으로 연주할 때, 한 악기의 현을 건드리면 가까이에 위치한 다른 악기의 현을 건드리지 않아도 그것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당신은 스스로에게도 동일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 당신의 감정을 이 구절의 어조에다 맞추기만 해보라. 만일 당신이 진정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닥친 동일한 괴로움을 상상해 보라. 그렇게 하여 당신의 마음이 보다 충분히 움직일 때, 당신의 주의를 가까이 집중시키고 이 거룩한 시편 기자의 심정을 자세히 살피라. 어떻게 그가 세상에서 물러나 스스로를 단절시켰는지를, 그리고 그 영혼의 슬픔을 어떻게 토로했는지를 살펴보라:내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주어진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토록 슬퍼하느냐? 유대인 필로(Philo)는 이렇게 말했다:하나님의 불꽃이요 광선인 내 영혼이, 마치 땅을 비추는 태양처럼 이 암담한 내 몸을 비추어야 할 네가, 나의 정신을 밝히고 내 기력을 북돋우어야 할 네가 어찌하여 구름에 가리워져 있는가?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고?······.

영혼의 압박을 느끼는 자들이여, 이것을 생각해 보라. 영혼의 압박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않는 자들도 이것을 생각해 보라.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를 이루는” 슬픔이 있음을 알라. “사망을 이루는” 슬픔도 있음을 알라(고후 7:10). 죄악 된 마리아를 하늘로 인도했던 슬픔이 있었음을 기억하라. 또한 죄악 된 에서를 허무에로 이끌었던 슬픔도 있었음을 기억하라. 순교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우리를 순교자로 만드는 것은 칼이나 뜨거운 납이나 불이 아니며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도 아니다. 그것은 ‘왜’ 순교를 당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슬픔에 있어서도, 슬픔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그 슬픔으로 인해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느냐 하는 점이 아니라 ‘왜’ 그런 슬픔을 당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심에 빠진 모든 이들은 스스로에게 “왜”라고 물어보도록 하자.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그것은 당신 자신의 죄악이나 다른 이들의 죄악 때문이 아닌가? 이 둘 중 어떤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든지 간에,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진노의 자녀요 마귀의 종이기 때문인가? 혹은 당신이 그들로부터 벗어나려 하기 때문인가?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시 120:5).

당신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좁고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의 수효가 적다고 하는 말씀을 읽고서 근심했던 성 어거스틴처럼 근심하는가? 아니면 “오라, 복받은 자여”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는 결코 기뻐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그리고 “가라, 저주받은 자여”라고 하는 쓰디쓴 선고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는 결코 슬픔을 멈추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성 베르나르와 같은 결심을 하는가? 만일 당신의 슬픔에 대한 원인이 이러한 것들이라면, 만일 그런 생각들로 인해 당신이 낙망한다면, 구주께서 이미 당신을 축복하셨음을 알라. 왜냐하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기” 때문이다(마 5:4). 천사들이 당신의 시중을 들며, 당신의 눈물을 모은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줄 보화들을 간직하고 계시며, 그것들을 부대에다 차곡차곡 쌓으신다. 성령께서 당신을 위로하시며, 당신을 떠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런즉 “낙망할까” 두려워하지 말며, “당신 속에서 불안해질까” 두려워하지 말라. -브라이언 듀파(Brian Duppa, The Soule’s Soliloquie라는 제목의 설교, 1588-1662).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이 구절이 본 시편과 다음 시편에서 세 차례나 사용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외에는 시편 전체에 걸쳐 같은 구절이 두 번 언급되는 경우가 없다. 다만 시 107편에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라는 구절이 수차례 반복될 뿐이다. 이 구절이 자주 언급된 것은 우리에게 그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임이 분명하다······.

사악한 자들이 다윗을 억압했으며, 마귀가 그를 시험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꾸짖었을 뿐이다. 다윗은 사울을 책망하지 않았으며, 압살롬을 꾸짖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꾸짖고 점검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비록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고 악인들이 죄에 대한 징벌의 도구로서 우리를 억압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윗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꾸짖어야 한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라는 구절이 원문상 능동문으로 번역되어 있음에 유의하라. 즉, 히브리어 원문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기진맥진하며, 네가 어찌하여 내게 대해 혼란스러워하는가”라는 뜻이다. 아리아스 몬타누스(Arias Montanus)나 로리누스(Lorinus)는, “네가 어찌하여 엎드러지며, 네가 어찌하여 내게 대해 낙망하느냐?”라고 해석했다(잠 12:25 참조). 이러한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도 죄의식으로 인해 낙망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매우 능동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당신을 낙망케 하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마귀도 아니다. 하나님이 타격을 가하시거나 마귀가 시험하는 것보다 당신 자신이 스스로 근심하는 측면이 더 많다는 것이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크리스토퍼 러브(Christopher Love, The Dejected Soul’s Cure, 1657).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현재 닥친 곤경 속에 하나님이 어느 정도나 개입되어 계시는지를 생각하라. (1) 그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가운데 닥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근심하는가? 그 곤경을 이미 알고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그대에게 최선책이 된다고 생각되었다면 그것을 멈추게 하셨을 것이다. (2) 그것은 그분의 명령에 따라 닥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대가 어찌하여 근심하는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주신 잔이다. 그런데도 그대가 그것을 마시지 않겠는가? (3) 그대가 고난당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가, 그리고 그 뜻을 거역하는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인가? (4) 하나님은 응당 그대에게 가하실 수 있는 곤경 이상을 허용하지 않으셨는가? 그대는 어찌하여, 마치 그분이 그대에게 잘못을 범하시기라도 한듯이 불평하는가? (5) 그것은 그분의 지혜로우신 처사의 일환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를 무시하고 그대 자신의 어리석은 뜻을 더 높이는가? (6) 그분의 길은 자비로우신 길인가? 어찌하여 그대의 반항적인 영혼은, 마치 거치른 길에서 넘어지듯이 그 길에서 넘어지는가? (7) 그대 앞에 닥친 일이 선한가? 어찌하여 그대는 마치 악한 것을 만나기라도 한 듯이 투덜거리는가? (8)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능히 감내할 수 있는 곤경인가? 그것은 그분의 독생자께서 감내하신 곤경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그런데도 불평할 근거가 그대에게 있는가? (9) 그것은 단지 그대에게 합당한 보응이거나 그보다 덜한 것인가?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한 징벌을 불평할 것인가?

(10) 그것은, 허용되는 분량상, 세심한 배려에 따라 정해지는가? ① 의사이신 그분의 손에 의해, ② 철저한 계획에 따라, ③ 그대의 기력에 맞추어, 그리고 ④ 견딜 수 있는 그대의 역량에 따라 그것이 정해지는가? 어찌하여 그대는 낙망하며, 어찌하여 불안해 하는가? 그것은 단지 그대를 희게 하며 정결케 하기 위함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그대의 지난 죄를 깨끗이 하고 앞으로 죄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곤경을 통해 그대는 현재 어떤 결실을 발견하는가? 이제 그대가 백토 덩어리로 변해 버렸는가? 그대가 형통할 때 그대를 사로잡았던, 그대가 갈망하며 안달하는 좋은 것들을 손에 넣을 때에도 그대를 사로잡는, 그리고 그대가 어떤 재난을 당할 것이라고 느끼며 두려워하되 사실은 그렇지 않을 때에도 그대를 사로잡을 그대의 각종 우상들이 이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는가? 그리스도인이여, 머리를 들어라! 그리고 그대의 영혼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말하라. 그대가 불안해 하는 일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묵상하라. -존 콜링스(John Collings<1623-1690>, A Cordial for a Fainting Soule, 1652).

5절.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불안하여”라는 단어의 보다 문자적인 뜻은 ‘소란스러워’이다. 이것은 요동하는 바다의 굉음에 적용되는 말이다(사 17:12; 렘 5:22; 6:23; 51:55 참조). -헨리 마치..

5절.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곤경에 처한 그리스도인에게 미치는 소망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그리고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소망은 곤경에 처한 그리스도인을 진정시키며 침묵하게 한다. 소망은,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이내 요동하고 말 마음속에, 마치 왕이 된 것과 같은 평안을 존속시켜 준다. 소망 없는 영혼은 소란스럽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분의 수단들을 모욕할 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소망이 없을 때, 그 영혼은 오래도록 안정을 누릴 수가 없다. 다른 그 무엇도 강퍅한 영혼을 진정시킬 수 없을 때, 소망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이는 마치 회초리를 들면 더 심하게 우는 아이가 엄마의 가슴에 안길 때 비로소 울음을 그치는 것과 같다. 다윗은 이 길을 택하였고, 그것이 효과적임을 발견했다. 현재의 곤경으로 인해 그의 영혼이 불안할 때, 그는 약속에 의지했다:”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여기서 그의 영혼은, 마치 엄마의 젖을 입에 문 아기처럼 단잠을 청한다. 그는 이런 일을 자주 체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시 42편과 43편에서 이러한 사례를 세 차례나 발견한다······

둘째, 이 소망은 곤경에 처한 영혼을 내적인 기쁨과 위안으로 채우며, 그리하여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한숨이 나오지만 그 영혼은 웃을 수 있다. 그것을 가리켜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이라 지칭한다(히 3:6). 소망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끼게 한다. 태양이 형형색색의 무지개를 드리워지게 하는 것은 그것이 물기를 머금은 구름 위에서 비췰 때이다······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기쁨으로 채우시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사용하시는 두 가지 은총들이 있는데, 그것인즉 믿음과 소망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기쁨의 포도주를 무진장하게 제공되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무슨 일을 이루셨는지를 알려준다. 또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게 함으로써 영혼을 소생시킨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윌리엄 거놀(William Gurnall)의 글에서 요약됨.

5절.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여기서 “바라라”로 번역된 단어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기초한 그리고 그 영혼으로 하여금 그분을 섬기도록 인도하는 ‘바람’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시편 39:7에 잘 표현되어 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헨리 마치.

5절.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도 가능하다. 물론 여기서의 죽음이란 둘째 사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첫째 사망을 가리킨다. 요나가 바다 속에 있을 때(욘 3장), 그가 니느웨에서 설교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느부갓네살이 수풀 가운데 있을 때(단 4장), 그가 다시 바벨론을 통치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을 때, 그 형제들이 그의 종들처럼 행세하며 그를 찾아가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욥이 거름더미 위에서 자신의 상처를 긁고 있으며 그의 집이 불살라지고 가축을 강탈당하고 또한 자녀들이 죽었을 때, 그가 예전보다 더 부유해지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이 모두는 은총의 행위들로서, 의인으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용맹스럽게 승리하셨다”고 노래 부를 수 있게 한다(출 15-21장 참조). -헨리 스미스.

5절.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마음은 ‘자비’보다는 ‘의무’에 더 쏠려 있는 상태이다. 그의 입에서는, 복된 실책으로 인해 자비 대신 의무가 언급된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할 때에, 그는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한다. -토머스 호턴.

5절. 그는 숙련된 의사로서, 질병을 제거함과 아울러 기력을 강화시킨다. 또한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악한 행실과 습관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들과 정반대 되는 은총들에 입각하여 살아가기를 힘쓴다. 그대는 어떤 곤경에 처할 때 조급하여 불안해 하거나 불만에 사로잡히는가? 그대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고분고분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라. 성결한 다윗은 그 정도까지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책망하여 잠잠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윌리엄 거놀.

5절. 앨리스 벤던(Alice Benden)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는 종교 문제로 다른 이들과 함께 캔터베리 성에 감금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주교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깊은 지하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는 친구들의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반 페니 어치의 빵조각과 1파딩 어치의 맥주만으로 연명했으며, 설사 돈을 지불한다고 해도 더 이상 음식을 제공받을 수가 없었다. 차꼬 한 벌과 돌벽 사이에 깔린 소량의 짚더미가 그녀의 잠자리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찌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토록 심한 고통을 주시는지를 그리고 그리운 감옥 동료들로부터 격리되는 고초까지 겪게 하시는지를 자문했다. 극도의 곤경 속에서, 그리고 그토록 고통스러운 신음 속에서, 그녀는 시편 기자의 말을 밤새도록 되뇌었다:”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은 그 오른손으로 이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실 수 있었다. 그녀는 슬픔 가운데서 위안을 얻었으며, 그리하여 석방될 때까지 줄곧 기뻐하였다.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e, Mirrour, 1599-1682).

5, 11절. 그대가 슬픔으로 인해 압박을 받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다윗에 의해 한 시편에서 두 차례 언급된 다음과 같은 물음을 그대의 마음과 영혼에게 던져 보라:”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리하면 분명 그대의 영혼은, “나의 슬픈 곤경은 나 자신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대는 다음 구절에 이어지는 치료책에 의해 그 질병을 알 수 있다:”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마음의 모든 슬픔은 대개 우리 자신의 불신에서 비롯되며, 다른 재난들의 심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파괴적인’ 슬픔이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슬픔은 경건한 기쁨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가련한 짐승을 괴롭히는 것은 그 등에 실린 짐의 무게라기보다는 그 등의 상처이다. 마찬가지로, 가련한 인생을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외적인 재난의 무게라기보다는 상처를 입었으되 믿음으로 씻음과 치료를 받지 못한 양심의 내적인 상처이다. -매튜 로렌스(Matthew Lawrence, The Use and Practice of Faith, 1657).

5, 11절. 우리 자신으로부터 곤경이 비롯될 때, 그것은 근심이나 불안이라 지칭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장 뛰어난 사람도 때로는 자신의 마음속이 이 악한 액체로 들끓게 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한 번이 아니라 자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외치곤 했다. 그가 자신을 괴롭히며 근심한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께서 한가하신 때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문이 잠기고 창문이 닫힌 방안에 갇힌 우둔한 새는 벽과 유리창에 이리저리 부딪혀 날개가 부러지고 몸에 상처를 입는다. 반면에, 집 주인에 의해 통로가 열릴 때까지 가만히 있으면 전혀 상처를 입지 않고도 밖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가두사 잠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실 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거기서 벗어나려고 헛된 노력을 기울이며 그분의 섭리라고 하는 벽을 깨트리기 위해 갖가지 꾀를 짜내려 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분의 때를 기다리며 그분의 약속에 의지하면서 그분의 손길에 의해 풀려나도록 스스로를 복종시킨다면, 우리는 이 감옥을 보다 쉽게 견딜 수 있을 것이며, 상처를 덜 입고서도 마침내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 마음이신즉, 어느 누가 그분의 마음을 변하시게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우리에게 정하신 일이 그대로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존 발로(John Barlow)의 설교, 1618.

5, 11절. 만일 그대가 확신을 갖고자 한다면, 천국과 관련한 그대의 증거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강화시키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위안거리들을 강화시키기보다는 그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큰 잘못을 범한다. 그들은 불신에로 인도하는 생각을 품으며, “여호와여, 내가 왜 믿어야 합니까? 이토록 불경건하고 자제력이 없는 내가 약속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말한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께 의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자신의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대의 위안거리들을 확신하기 위해 노력하며, “어찌 내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나이까?”라고 반문하라. 다윗이 그렇게 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하나님의 은총이 인생의 죄악보다 더 위대하지 않은가? 죄가 있는 곳에 무상의 은혜가 있지 아니한가? 정죄가 가해져야 합당한 곳에 사죄의 은총이 있지 아니한가? 우리는 자신의 위안거리들을 소멸시키기보다는 그것들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생각을 집중시키며, 그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강화시키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엄청난 면적의 땅을 소유하고서도 회의와 망설임에 젖어 자신의 소유권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매우 우둔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천국에 대해 우둔하게 처신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는 훌륭한 언약과 보증을 지니고 있지만,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며 불신 가운데로 빠져든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을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위안거리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강화시켜야 한다. -크리스토퍼 러브.

6절.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주를 기억하나이다.” 내 영혼이 매우 의기소침하고 깊은 슬픔에 잠겼으므로, 내가 주를 기억하나이다. 나는 주께서 ‘곤경에 처한 가련한’ 주의 백성을 얼마나 겸허하게 보살피시는지를, 그들이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아 내던져질 때 주께서 얼마나 흔쾌히 그들을 받아주시는지를, 또한 그들이 주 앞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붓듯 그 답답한 심경을 토로할 때 주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인내함으로 그들의 불평을 들으시는지를 기억하나이다. 나는 과거에 내게 베풀어주신 주의 인자하심을, 주께서 어떻게 나의 곤경을 돌아보셨는지를, 어떻게 나를 도우사 그 짐을 지셨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내 영혼에 기력을 더하사 나를 강하게 하셨는지를 기억하나이다. 내가 주의 전에서 주를 기다릴 때 혹은 ‘땅에서 특출한 자들인, 주의 성도’와 함께 거기서 주를 찬양할 때 주의 임재를 즐겼던 그 모든 일들을 나는 기억하나이다. 나는, 주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그리고 주께서 나같이 황폐한 존재가 의지하기에 그 얼마나 적합한 대상이신지를 기억하나이다. 왜냐하면 비록 나는 궁핍하되 주는 부요하시며, 나는 연약하지만 주는 강하시며, 나는 비참하지만 주는 행복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께서 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나이다. 주께서 내 영혼에 스스로를 계시하셨으며, 주께서 나로 하여금 주를 나의 분깃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하셨고, 또한 나로 하여금 주를 의지하며 결코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셨음을 나는 기억하나이다. 주께서 나로 소망하게 하신 그리고 과거에 줄곧 신실하게 이루어오셨던 그 약속의 말씀이 끝까지 존속될 것임을 나는 기억하나이다.” 시련에 처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얻을 수 있는 자들은, 설령 불행한 상황에 직면해 있더라도 그 얼마나 행복한가! -헨리 마치.

6절. “내 하나님이여.” 놀라운 표현이다. 온 땅의 창조주시요 하늘에 계신 절대 주권자를 누가 감히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겠는가? 유배자요 방랑자요 쫓겨난 자요 버림받고 멸시와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 낙망하고 불안해 하는 영혼이 감히 그렇게 부른다. 무슨 권리로? 언약의 권리로 그렇게 부른다. -헨리 마치.

6절.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시편 기자가 다시 위안을 얻기 위해 취한 과정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주의 선하심과 관련된 세 차례의 체험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요단 땅”, “헤르몬” 땅, 그리고 “미살산” 등에서의 체험들이 바로 그것이다:먼저, 그는 요단 땅을 기억할 것이다. 말하자면, 요단강을 마르게 하사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인자를 기억할 것이다. 이제껏 선하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선하실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헤르몬 땅을 기억할 것이다. 그 땅에서 아모리 족속의 왕인 시혼과 바산 왕 옥이 패배를 당했다. 여호수아 12:1은 이렇게 전한다:”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산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를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 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미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율법이 주어졌던 시내산과 가까운 자그마한 언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옛적에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여 자기 마음속에 위로와 평안을 되찾고자 한다. -크리스토퍼 러브.

6절. “헤르몬.” 헤르몬 혹은 헤르몬산의 봉우리들과 능선들. ‘헤르몬산들'(한글 개역 성경에는 단수로 번역됨-역자 주)이라는 복수형은, 그 정상이 두 군데이기 때문이거나(윌슨, Land of the Bible) 혹은 눈 덮인 산맥 전체를 가리키고자 한 때문일 것이다. -스튜어트 퍼론.

6절. “헤르몬.” 헤르몬은, 어떤 이들의 생각처럼, 헤르몬산과 요단강 그쪽 편의 다른 산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는 바알림이 바알 및 그것과 더불어 숭배되었던 다른 우상들을 함께 의미하는 것과 같다. 혹은, 헤르몬산이 단일한 산으로 여겨진 것이 아니라 알프스나 앨러게니처럼 산맥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더 많다. -알렉산더(J. A. Alexander).

6절. “미살산에서.” 과거에 풍요한 삶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 앞에 놓인 길을 행복한 눈으로 조망할 수 있다. -J. P. Lange’s Commentary.

7절.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여기서 그는 두 가지 무시무시한 자연 현상을 결합시켜 표현하고 있다. 유대 해안에서는 폭포 소리를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여행자들의 경험에 따라 확증될 수 있는 바이다. 이러한 폭포 소리는 거대한 구름 덩어리로부터 한 지점으로 쏟아져 내리는 집중 호우의 요란한 소리를 동반하는 듯하다. 한편,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 새겨진 광경은 이 거대한 폭우가 이미 격노한 상태인 바다 속으로 떨어져 그 물결을 더욱 요동치게 하는 모습인 듯하다. 이 얼마나 무서운 광경인가! 만일 여기다 폭풍우 이는 캄캄한 하늘과 귀를 먹게 할 정도의 흉흉한 파도소리까지 함께 떠올린다면, 더욱 무시무시할 것이다.

그러한 폭풍우 가운데 배 한 척이 떠 있다면 그 상황은 어떠하겠는가! 위로부터 폭우가 퍼부어내리고, 사방에서는 격노한 바다가 엄청난 파도를 일으킨다. 그 얼마나 제어 불가능하며 무기력하게 보이는가! 또한 거의 이적적인 어떤 손길의 개입이 없이는 거의 침몰을 면치 못할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다윗은 곤경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자신의 영혼 상태를 그런 상황에다 비교한다:”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그런 식으로 비교하게 만든, 그리고 극한적인 위험과 공포를 나타내는 그토록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게 만든 그의 슬픔은 얼마나 쓰라린 것이었겠는가! -헨리 마치.

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퍼붓는 폭우 소리 속에서, 위의 심연이 아래의 심연을 부른다. -탈굼역.

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가 기도를 부르고 믿음이 믿음을 부르며 또한 한 은총이 또 다른 은총을 부르게 하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면, 그것은 첫번째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두번째로 시도할 수 있으며, 그래도 안 되면, 세번째로 시도해볼 수 있다. -토머스 호턴.

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한 이유는 앞 절에 표현되어 있다:”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그러한 낙망은 불신과 공포의 깊은 아가리 속으로 가라앉나이다. 또한, 여호와여, 이 깊은 슬픔에 처한 내 영혼은 주의 깊으신 은총에 도움을 청하나이다. 왜냐하면, 비록 내가 점점 더 가라앉지만, 그 아래에서는 주의 은총이 나를 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긍휼을 베푸사 영원하신 팔을 벌리시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홀로 괴로워하는 자를 붙드소서. 왜냐하면 나는 마치 우물이나 지하감옥 아래로 떨어지는 자와 같은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John Bunyan).

7절. 여기서 시편 기자는 진노와 두려움을 초래하는 속박을 느낀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기를 기도하며, 사랑과 능력의 영인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도움을 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는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른다”고 불평한다. 무시무시한 구덩이에 빠진 영혼의 귀에는 보복을 위한 율법과 공의의 요청 이외에는 다른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한 요청은 항상 사탄과 양심의 정죄를 수반한다. 시나이 반도의 폭풍우는, 바다의 소용돌이처럼 진노의 집중 호우로써 배를 위협하고 이내 그것을 파멸의 심연으로 가라앉히려 한다. 이와 같이 가련한 인생에게 엄습하는 실제적인 파도와 불길한 상상(결코 실제보다 덜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은 언제라도 배를 바닥으로 침몰시킬 기세이다. 배교적이며 타락한 영혼은, 특히 복음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공공연하게 비방하는 자들은 이런 무서운 방법을 통해 정결해지고 교정을 받게 된다. -윌리엄 헌팅턴(William Huntington, Contemplations of the God of Israel, 1744-1813).

7절. “주의 폭포 소리.” 부스로이드(Boothroyd) 박사는 이 부분을 “주의 폭우”로 번역한다. 이러한 번역을 정당화함에 있어, 그는 다윗의 상황이 이와 같이 강력한 어조로 표현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다윗은 벼랑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보았고, 그 요란한 굉음을 들었다. 그 폭포 소리는 마치 도움을 호소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는, “곤경과 근심이라고 하는 흉흉한 물결들아, 모조리 내게 밀려와서 나를 엄몰하라”고 말한다. -존 모리슨(John Morison).

7절. “폭포 소리.” 서편 수평선을 따라 무거운 마포 덮개처럼 바다 위로 드리워진 구름을 보라. 이와 같이 바람 부는 궂은 날에는 그 구름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형성된다. 그 물기둥의 보다 낮은 부위로부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이미 목격한 적이 있다. 주목할 만한 이 현상은 봄에 가장 흔히 일어나지만, 나는 가을에도 그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많은 비를 동반하지는 않는다. 위의 캄캄한 구름층과 바다 사이의 하늘은 맑고 밝다. 수증기를 가득 머금은, 마치 기다란 깔대기처럼 생긴 시커먼 구름 조각들이 바다 위에 여기저기 비를 뿌리고, 바람을 따라 격렬하게 회오리친다. 그 바로 밑에 위치한 바다의 수면도 회오리에 의해 요동하며, 위로부터 쏟아져내리는 빗물과 함께 어울린다. 나는 이 두 가지 현상이 대기 중에서 실제로 결합하여 마치 거대한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 자태를 꼬거나 굽히면서 산 쪽으로 돌진하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그것은 마치 머리는 구름 속에 있고 그 꼬리는 바다의 수면 위에 놓인 거대한 뱀과 같았다.

물론 그것은 요란한 굉음을 내고 매우 무시무시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다윗의 영혼이 속에서 낙망했을 때, 그는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비록 그 광경은 무시무시하지만, 그것은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것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경우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선원들은 그것을 매우 두려워하지만, 그것은 심지어 자그마한 거룻배에조차 어떤 타격을 입힌 적이 거의 없다. 그것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해체되어 사라지고 만다. 한편, 대개 여름의 건기에 그런 류의 소낙비가 산지에 퍼부어지면, 엄청난 재난이 발생한다. 단 몇 분만에 와디들이 급류로 바뀌어, 곡물과 올리브와 건포도 그리고 갖가지 다른 농작물들을 쓸어가 버린다. 나는, 양 떼와 염소들이, 그리고 심지어는 소나 말들과 그들의 주인들까지 그 급류에 휩쓸려가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톰슨

7절. “주의 파도와 물결.”

깊은 바다가 끊임없이 서로 부르고,

격노한 폭풍우에 의해 뒤흔들리며,

끝없는 파도와 물결이 덮쳐와,

쇠진한 내 영혼을 압도한다.

하지만 나는 폭풍우 가운데서,

전능하신 주재자를 바라본다.

사랑으로 가득한 그분의 통치와 인도는,

항상 변함이 없다.

그렇다, 가장 비통한 슬픔 가운데서도,

믿음은 주의 섭리를 응시하며,

겸손히 엎드려, 모든 파도와 물결이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게 한다.

-헨리 마치.

8절.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명하시고.” (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베푸시고”로 번역됨-역자 주.) 시편 기자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단지 여호와께서 인자함을 나타내신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명하신다고 표현한다. 주께서 베푸시는 은사가 은혜-무가치한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은총-이듯이, 그것을 베푸시는 방식은 주권적이다. 그것은 명령에 의해 주어진다. 그것은 왕의 하사품이다. 만일 그분이 축복을 명하신다면, 누가 그것을 막겠는가? -헨리 마치.

8절. 경건한 자에게는 낮과 밤이 한가지이다. 지키시는 방패요 위로의 태양이신 하나님이 항상 함께 동행해 주시는 자에게 밤이 무슨 장애 요인이 되겠는가?(시 84:11). 그 얼굴의 광채가 조금만 비치어도, 경건한 자는 낮의 태양이 제공하는 다른 모든 위안들보다 더욱 큰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라고, 또한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밤이 경건한 자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인 반면에 악인에게는 가장 서글픈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악인은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지만, 그의 안전의 바탕에 해당하는 바로 그 어둠 때문에 두려워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릴 때 유쾌해질 수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즐길 때에 더욱 큰 기쁨을 맛볼 것임이 분명하다. 경건한 자가 밤에 느끼는 기쁨이 바로 그러하다. 밤에는 그를 방해하던 일들이 대부분 사라지며, 그는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전능자를 기뻐할” 수 있다(욥 27:10). 다윗은, 사실상 여호와께서 낮에는 그 인자함을 베푸시지만, 밤에는 그 찬송이 자신의 입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찬송”이란, 내가 생각하기에, ‘감사’의 찬송이 아니라 ‘기쁨’과 ‘환희’의 찬송이다. 이러한 기쁨은 시련에 처한 자에게 하나님이 종종 주시곤 하는 것이다(욥 35:10). ‘낮’에는 영혼이 천박한 일들에 너무 얽매이며 갖가지 감각적인 일들로 인해 너무 혼란스럽고 또한 육신을 위한 일에 너무 분주하여 자기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기쁨은 그 어떤 것 못지않게 큰 것이다). 낮에는 할 일이 별로 없는 밤에 비해 제대로 자신을 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적이고 육욕적인 사람은, 내가 밤과 잠에 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언급하는 노래와 찬송을 단지 광란이나 기껏해야 공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미치광이나 뇌손상을 입은 자들이 허공에 뜬 이야기를 하듯이. 그러나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들에 관해 이르기를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행 2:15)고 한 것과 같이,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문제가 아니다. 경건한 자들은 너희 생각처럼 미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래는 자신의 공상이나 그들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직접 제공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응수할 수 있다. 그는 “밤중에 노래하게 하신다”(욥 35:10). -자카리 보간.

8절.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여기서 다윗의 신앙은 구원받기 전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기도하는 신앙임이 드러난다. 곤경 중에 부르짖는 이기적인 사람은 그 곤경이 사라지면 기도도 멈출 것이다. 다윗의 경우에는 정반대였다. 곤경으로부터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신은 강화될 것이었고, 그는 담대히 그분께 의탁하며 새로운 신앙적인 논리로 무장할 것이었다······구원받은 후에 기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구원의 때는 종종 시험의 때요, 영혼이 고양되어 자제력을 잃기 쉬운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에 느끼는 기쁨이란 대부분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일 뿐이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몸까지 상하게 하는 근심으로부터 구출될 때 아마 그러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때에는, 그 기쁨이 모두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보다 더 많은 은총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된 안정 상태에 빠져드는 실수를 범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런 때에, “주께서 나를 붙드시면 내가 안전하리이다”라는 기도가 각별히 요청된다. 낙관적인 성격을 지닌 자들 중에는 즐거울 때에 이내 의기양양해져서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특히 흔하다. -헨리 마치.

8절 하반절. 그대의 찬송과 기도는 “생명의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그대가 하나님을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엡 1:23) 분으로 인정하며 또한 그분 한 분만으로 자족해 하지 않는 한, 그대는 그분을 하나님으로 섬길 수 없다. 만일 그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분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로서 그대가 그분과의 신령한 연합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다. 그런즉, 그와 같은 복된 연합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기뻐하라. -존 하우(John Howe).

9절. “내 반석이신 하나님.” 다윗은 도피하는 중이었고, 방어 수단도 거의 없었으며, 많은 수효의 강한 대적들에 의해 끊임없이 추격당하고 있었다. 그가 배회했던 지역은 산악지대였으며, 종종 그는 가파른 바위 꼭대기나 천연적으로 움푹 패인 곳 혹은 동굴을 피난처로 삼았다. 따라서 그의 마음속에서 피난처와 방어의 개념은 바위와 결부되었다. 그가 그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우며, 또한 그분을 자신의 피난처와 도우시는 분으로 의뢰할 때 그분께 그런 명칭을 돌린 것도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그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잊어버린 바 되어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피난처로 여기고 그분의 은총을 받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그분의 신실하심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인즉 냉철한 판단이 아니라 감정 상태를 나타낸 것일 뿐이다. 아마도 그는 마치 하나님께 잊혀진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예전에 그에게 풍성히 임했던, 그리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가 기억되고 있다는 표시로 여겨졌던 그분의 사랑과 은총이 이제는 그쳤다. 낙심에 빠진 그때야말로 그것들이 간절히 요청될 때였고, 따라서 그는 마치 하나님께 잊혀진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헨리 마치.

10절. “내 대적.” 그에게 대적들이 많았다는 것은 이상스럽게 여겨진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줄 몰랐고, 그들이 병들고 낙심에 빠졌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그들을 위해 굵은 베옷을 입었다(시 35편 참조). 이처럼 동정심 많고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그를 심하게 비방하는 대적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신앙을 비난함으로써 가장 쓰라린 아픔을 맛보게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적들의 험담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무장시킬 수 있다. 설령 우리가 이 세상에서 대적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로 인해 심한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근심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놀랄 필요는 없다. 우리 구주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많은 선을 베푸신 이가 있는가? 그는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행 10:38). 그는 해로운 이적은 결코 행하지 않으셨고(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죽은 적도 있지만, 그것마저 그들 자신의 결함 때문이었다), 두루 다니시며 가능한 한 많은 선을 행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로 가득한 대적들이 그분을 대항했다. 머리 되신 주님께 생기는 일은 지체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대적들과 핍박에 직면할 때,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기뻐해야 한다. 마귀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선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속박된 상태이고 그의 성향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재난을 야기시키기도 하지만, 그의 터전은 지옥일 뿐이다. 마귀가 선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대적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귀는 결코 선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세상에 선한 왕들과 선한 통치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귀가 살아 있는 한 그리고 그가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경건한 자들은 항상 대적들과 마주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적들을 예측해야 하며, 그들이 자신의 적의를 감추지 않을 상황도 예측해야 한다. 설령 그들이 자신의 적의가 마음속에서 끓는 것을 참으며 거짓 된 말을 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마 12:34) 때문이다. -리처드 십스.

10절. “날마다 내게 말하기를.” (KJV 직역. 한글 개역은 “늘 말하기를”이라고 번역했다-역자 주.) 대적들의 태도와 말이 집요하고 끈질겼다는 사실이 여기서 나타난다. 그들은 “하루 종일” 조롱하였다. 적당히 하고 물러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리고 자주 그렇게 했다. 그것은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 그들은, 마음이 들뜬 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아침에 시작하여 밤중까지 계속하였다. 또한 그들은 한 주간을 그렇게 시작하여 그 주간의 끝 날까지 계속했다. 그가 그들 가까이 갈 때마다, 항상 그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 -토머스 호턴.

10절.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다윗은 오히려 그들에게, “너희들의 눈이 어디 있느냐? 너희의 안목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실 뿐만 아니라 내 속에도 계신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다윗이 성소로부터 단절된 신세이긴 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위한 성소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소에 얽매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두 가지 성소가 있고, 두 가지 하늘이 있다. 천상의 하늘과 인간의 상한 심령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심과 같이 다윗 속에도 거하셨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계셨고 다윗 안에 계셨다. 다윗에게 가장 큰 곤경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더욱더 그와 함께하셨고 그리고 그의 심령 속에 계셨다. 그들에게는 안목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셨다. 비록 때로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숨기되 세상으로부터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로부터도 숨기시지만, 그는 항상 거기 계시다. 그들의 슬픔이 시야를 흐리게 할 정도로 몹시 심할지라도(하갈의 경우에서처럼), 그리하여 그들이 당분간 그분을 볼 수 없을지라도, 그는 때때로 그들의 얼굴을 살피신다(마리아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또렷하게 볼 수 없었고, 단지 그분을 동산지기로 생각했다.

천상의 지혜도 잠시 숨겨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 계신다. 그들은 느낌으로는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믿음으로는 알 수 있다······그러므로 그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은 것은 무지한 질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당신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무지함을 보여주었다. 사실 성도의 신앙을 조롱하는 자보다 더 심한 무신론자도 없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마치 하나님이 눈으로 볼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한, 그 자녀들을 향하신 그분의 섭리를 외적으로 관찰할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때로는 스스로를 숨기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는 대체로 인간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당신을 계시하신다. 그분의 사역은 역설적이다. 하지만 이 육욕적인 자들은 신앙의 신비에 대해 무지했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신 그분의 신비한 섭리에 대해 무지했다. 따라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그들의 물음 속에는 그들의 무지하고 악한 기질이 풍겨난다. -리처드 십스.

10절.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핍박자들이 시련과 환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던지는 조롱조의 질문이다. 그들은, “이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우리 하나님은 여기 계시다”는 담대하고 확신에 찬 대답이 돌아간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며, 우리 주위에 계시며,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한 우리 하나님은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히 13:5). 모든 환난에서, 모든 위험에서, 모든 사망의 골짜기에서, 여호와께서는 분명코 우리와 동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과 줄곧 동행하시되, 그들이 환희의 낙원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황량한 광야에 있을 때에도 동행하실 것이다(호 2:14). 일단의 가련한 그리스도인들이 유배지로 향하고 있을 때, 그 행렬을 바라보던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그 가련한 자들이 인간 사회로부터 갑자기 격리되어 들판의 짐승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서글픈 상황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르기를,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 장소로 옮기워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서글픈 상태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용기를 내어도 좋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가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사 위로하실 것이다. 그분의 임재는 무한하여 모든 곳을 채우신다. 유태인 율법학자들은 ‘장소’를 뜻하는 “마콤”을 하나님의 성호들 중 하나로 언급한다. 바이스너는 에스더 4:14 내용인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를 언급하면서, “다른 데”를 ‘하나님’으로 해석했다. 이들이 하나님을 ‘장소’로 지칭한 것은 그분이 어디에나 계시며 천지가 그분의 임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토머스 브룩스.

10절. 숲의 파리들은 비록 자그마하지만 위풍당당한 전마를 미칠 지경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다윗은 이르기를,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라고 했다. -프레더릭 윌리엄 로버트슨(Frederick William Robertson, 1851).

11절. 여기서 다윗의 본을 따라, 애매모호한 근심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대 영혼을 고무시켜라. 그대에게 슬픔을 야기시킨 원인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대를 낙심케 한 원인이 다르면 그 처방도 다를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영혼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묻고 있는 동안,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거나 그대에게 제공된 위로와 구원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주의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시편 기자처럼 인내하며 검토를 계속 거듭하라. 기도하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라. 자기애에 빠지거나 그대의 마음이 현혹되면 속임수에 걸려들 수 있다. 그런즉, 그대를 살펴 그대 속에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시 139:24)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 -헨리 콜락(Henry Kollock, D.D., Sermons, 1822).

11절. “바라라.” 소망은 태양과 같다. 우리가 태양쪽으로 나아가면 우리 그림자는 우리 뒤로 드리워진다. -사무엘 스마일스(Samuel Smiles, LL.D.).

11절.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 다윗의 건강한 안색은 그의 용모에 달려 있지 않고 그의 하나님께 달려 있었다. 이 점은 믿음을 통해 두려움을 가라앉게 했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자신이 아무리 무덤에 가까워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할”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호히 확신하게 만들었다. 믿음은 이르기를, 그대에게 주어진 은총이 얼마나 건강하고 활기에 찬 것인지는 그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한다.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바라보다가 우울해지고 슬픔에 잠긴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윌리엄 거놀.

11절. “내 얼굴을 도우시는.” 종종 얼굴은 그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누가 슬프고 누가 행복한지는 그 얼굴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안색은 풀이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3-5)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얼굴은 슬픔으로 인해 그 어떤 사람의 얼굴보다 심하게 일그러졌고 그분의 용모 역시 그러했다. 순교자 스데반은 예수님의 모습에 압도당하여, 핍박자들 가운데서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다. 친애하는 독자여, 그대의 얼굴은 어떠한가? 그대의 안색은 슬픈가? 아니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기쁨으로 빛나는가? 과연 그것은 그대의 삶과 운명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덴햄 스미스(J. Denham Smith, 1860).

11절. 당신은, 햇살이 내리쬐는 2월에, 하늘은 푸르고 산울타리를 이룬 관목들에 눈이 트고 언덕 아래로 앵초 무리의 꽃들이 피기 시작하며 또한 덤불 속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이미 봄이 찾아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달콤한 향기를 날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서 구름이 다시 밀려오고 공기가 싸늘해지며 새들이 울음을 멈추고 지면에 내린 눈은 녹지 않은 채 그대로 있게 되면, 당신은 결코 봄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은 자신의 두려움이 제거되고 복음의 위안이 자기 마음속에 두루 퍼지는 것을 발견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그 입으로는 새로운 노래를 발한다. 또한 경솔하게도 그는 자신의 곤경들이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 의심이 밀려들고 위안이 사라지며 빛이 제거되고 또한 그의 영혼이 어두워지면, 그는 어쩔 수 없이 구원과 그 모든 축복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봄은, 비록 늦어지기는 하지만 마침내 도래할 것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솔터(H. G. Salter, Book of Illustrations, 1840).

11절. 지금까지 피력된 시편 기자의 논거들은 매우 강렬한 의미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1)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그는 “당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그는 “당신의 얼굴을 도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4) 그는 당신이 그처럼 (분명히 그리고 영원히) 찬양드릴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5) 당신의 현재 상황이 힘들고 조악하여 한탄스럽고 절망적인 만큼, 당신은 더욱더 그분을 소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심각한 환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잘 이해하시며, 깊이 고려하시며, 지혜롭게 권유하시며, 은혜로운 심령과 최선의 용기를 베푸시며, 또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다. 또한 우리가 쓰라린 환난과 낙심 가운데 처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소망이 더욱 간절해진다. 다윗은 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② 그러한 확신에 사로잡힌 이유와, 그리고 ③ 그 이유를 역설할 지혜와 마음을 지녔다.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영혼이 은혜로운 상태임을 알아차렸으며, 하나님이 그러한 심령 상태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했고, 그래서 그분께 받은 은총을 상기함으로써 그렇게 할 기회와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그러한 관심을 무시하거나 잃지 않으려 했다. 그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들을 예전에 경험한 바 있으며, 그것들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는 그분에 대한 찬양도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과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알 수 있는 한도내에서 하나님의 모든 완전하신 행사들을 새롭게 기억해야 했고 자신의 마음속에 그 강렬한 의의를 각인시켜야 했다. -매튜 실베스터(Matthew Sylvester, Morning Exercises, 1636-1708).

11절. 한번 크게 동요된 영혼은, 흔히 그 연약성과 부패성 때문에 이내 진정되지 않는다. -헨리 마치.

[설교힌트]

1절. 갈망하는 심령과 갈증으로 인해 헐떡이는 사슴이 비교되어 있다.

1, 2절. 공적 종교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던 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면, 다시금 그러한 은총을 회복하게 되기를 갈망할 것이다······하나님의 전에서 드려지는 공적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은 우리의 영혼에 큰 유익을 주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1) 여호와의 전에서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흥미를 새롭게 함으로써. 그러한 흥미는 너무나 자주 그리고 너무도 쉽게 시들해지곤 한다. (2) 우리로 하여금 은총의 수단들을 보다 귀하게 여기게 만듦으로써.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도 그것이 흔하거나 풍족하므로 혹은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3)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게 함으로써. -헨리 마치.

1-3절. 영혼의 향수병. 그것은 영혼 속에 무엇을 일깨우는가? 그것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며 또한 무슨 의도를 담고 있는가? 무엇으로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비통스럽긴 하지만 때로는 온전한 음식 역할을 하는 눈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랑게.

2절. (1) 무엇이 갈망하는가? “내 영혼.” (2) 무엇을? “하나님을.” (3) 어떤 방식으로? “어느 때에 나아가서.” 혹은 영적 갈망의 원인, 동기, 장점, 그리고 그 특권.

2절 하반절. 공적 예배에 대한 참된 견해.

2절 하반절. 지금과 향후에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 -아이작 왓츠, Two Sermons.

3절. 신자의 사순절. (1) 그 슬픔을 야기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2) 무엇이 그것을 제거해 주겠는가? (3)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은 무엇인가?

3, 10절. 다윗의 대적들의 태도. (1) 그 특성:그것은 일종의 ‘질책’이었다. (2) 그 표현:“사람들이······나더러 하는 말이.” (3) 그 지속성:“종일.” (4) 경멸적이고 모욕적인 그 구체적인 내용:“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토머스 호턴.

4절. (1) 슬픔에 처해 있을 때,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현재의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2) 과거의 즐거움을 회상함에 있어, 공적 예배를 상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각별한 효과가 있다. (3)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따라서 공동의 예배를 통해 도움을 얻는다. -헨리 마치.

4절.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불신에 찬 자기 반성의 무익함.

4절. “무리와 동행하여.” 선한 교제는 여러 측면에서 위안을 주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1) 그것은 인간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케 한다. (2) 그것은 위험에 대한 방어벽 역할을 하며, 갖가지 시험들과 슬픔으로부터 지켜 준다. (3) 더 많은 선을 행할 기회를 제공한다. -토머스 호턴.

4절. “인도하였더니.” 유쾌한 기억들은 감사와 소망으로 연결된다.

4절 하반절. 초서(Chaucer)의 캔터베리 순례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윗의 예루살렘 순례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5절. 슬픔의 원인을 묻는다. 또는 위안적인 문답이라 할 수 있다.

5절.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감미로움과 안전함 그리고 의로움. 닻을 든든히 움켜잡는 것과 같다.

5절. 장래의 노래.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5절. “그 얼굴의 도우심.” 혹은, 하나님의 임재의 보존하시는 권능.

5절.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1) 심지어 매우 경건한 사람의 마음도 쓸데없이 낙망하며 불안해질 수 있다. (2) 쓸데없는 낙심과 근심에 사로잡힌 경우에, 적절한 치유책은 유일하고 참된 구원의 근거에 집중하는 것이다. (3) 낙심의 시기에는 자신의 영혼을 설복시켜 곧바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헨리 마치.

5절. 자문과 자기 점검의 중요성. 다윗은 자신의 현재적 시련과 마음의 근심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책망과 질책의 중요성. 다윗은 현재의 불안으로 인해 자신을 질책하고 있다. “네가 어찌하여······.” -토머스 호턴.

5, 11절. 도움과 건강.

6절. “주를 기억하나이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얻는 위안.6절. “······되므로······주를 기억하나이다.” 본문을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며, 그 둘 다 교훈적이고 유익하다······(1) 현재 직면한 상황과 장소에서 하나님이 분명코 함께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결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자들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서도 최선의 소망을 품을 수 있다. (2) 회고를 통한 격려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체험한 적이 있었다. -윌리엄 제이(William Jay).

6절. 에벤에셀(‘돕는 돌’이라는 뜻-역자 주)들은 많고 다양하며, 이를 기억하면 큰 도움이 된다.

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Spurgeon’s Sermons,” No. 865).

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한 가지 죄악은 또 다른 죄악을 부른다. (1) 죄악의 다양성-한 죄악이 다른 죄악을 부름. (2) 죄악의 연결성-한 죄악은 다른 죄악으로 연결됨. (3) 죄악의 연관성 혹은 상호의존성-한 죄악은 다른 죄악에 의존함. -토머스 호턴.

7절. 하나님의 성도들과 종들이 이생에서 빠지게 되는 세 가지 심연. (1) 시험의 심연. (2) 버림받음이라는 심연. (3) 곤경과 재난의 심연. -토머스 호턴.

7, 8절. 곤경의 때에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흔쾌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 구분된다. -헨리 마치.

8절. 낮의 은총과 밤의 찬송. 햇빛의 은총과 그늘의 은총.

8절 하반절. 찬양과 기도를 반복하는 복된 모습.

8절. “생명의 하나님.” 생명의 창조자, 보존자, 위로자, 목표, 면류관, 그리고 그 생명의 완성이신 하나님.

8절. “생명의 하나님.” 우리의 생명은 세 가지이며, 하나님은 각 경우에 있어 그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첫째, 자연의 생명. 둘째, 은총의 생명. 셋째, 영광의 생명. -토머스 호턴.

9절. “내 반석이신 하나님.” 주어진 상황에 따른 하나님의 성호이다. -헨리 마치.

9절. (1) 어찌하여 주께서? (2) 어찌하여 나를? (3) 어찌하여 원수로 인하여? 의문의 대상은 세 가지이다. 하나님에 대해서:“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다윗 자신에 대해서:“내가 어찌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그리고 다윗의 대적들에 대하여:“어찌하여 그들이 나를 압제하나이까?” -토머스 호턴.

10절. 가장 통렬한 조롱.

11절. “내 하나님.” (1) 자신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2) 그분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3) 그분을 기뻐하는 사랑의 마음이 담긴 말이다. -토머스 호턴.

11절. (1) 하나님과 관련된 다윗의 체험:“내 얼굴을 도우시는.” (2) 하나님과의 관계 및 그분에 대한 관심:“내 하나님.” -토머스 호턴.

2018/06/11(월) “시편 42:1-11” / 작성: 강요섭

본문 시편 42편 1-11절

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갈망함(1-5)

시편 42편은 시편 5권중에서 2권의 첫 시편입니다. 2권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돌보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소라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42편과 43편이 하나로 묶여서 발견되기도 하였고 본문에도 42편 5절과 11절이 43편의 5절에 반복되어 나타난 것을 보면 두 시편이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표제어를 보시면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민수기 16장에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하나님 앞에 교만함으로 반역을 꾀하다 죽은 고라의 후손들입니다. 비록 그들의 조상인 고라는 반역으로 죽었지만 그 후손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박해자 사울을 복음의 전달자로 바꾸신 것처럼 반역의 아이콘이었던 고라의 후손들을 찬양의 도구로 삼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또한 시편 42편은 고난속에서 인생의 캄캄한 밤이 찾아올 때 하나님을 소망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한 마스길 곧 교훈의 시이며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고난의 밤을 맞은 시편 기자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편 기자는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갈증이 얼마나 심하였던지 물이 없어 헐떡이며 죽어가는 사슴 같다고 합니다. 그 갈증은 무엇을 향한 갈증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고난 속에서 세상의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시편 기자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에게 찾아온 것은 자신이 그토록 찾고 있던 하나님의 응답이 아닌 사람들의 조롱소리였습니다. 3절입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편 기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조롱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고통을 비웃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니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시냐? 니가 섬기는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냐?’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고난이 다가오면 그 고난 자체의 아픔도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 ‘니가 섬기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그런 힘든 일이 생겨?’라고 물어보는 질문과 조롱에 더 비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시편의 기자는 입에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마음이 상하여 주야로 흘리는 눈물만이 그의 음식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의 조롱 외에 시편 기자를 힘들게 한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즐거운 기억’이었습니다. 4절입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편 기자는 절기를 지키는 무리들과 함께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가던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향하여 가던 그와 함께한 많은 사람들 속에는 큰 기쁨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이 현재의 비참함과 비교되어 그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조롱과 과거와의 비교에서 오는 슬픔은 시편 기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이것은 시편 기자가 자기 영혼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속에 불청객처럼 낙심과 불안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고난의 밤이 찾아오면 낙심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어떻게 그 고난의 밤을 이겨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소망한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낙담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나타나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도우심’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는 ‘예수아’ 곧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곤란 중에 건지시고 고난 속에서 피할 길을 내시는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긴 밤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동이 틀 것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의 기자도 고난의 밤이 깊어가지만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소망으로 인하여 그 밤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의 고난이 캄캄한 밤처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이고 또한 주위에 그것으로 인하여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어 마음이 낙심되고 불안할 때에도 조용히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소망할 때 우리는 고난의 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소망함(6-11)

계속해서 본문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를 기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6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요단 땅은 요단강 근처지역을 이야기하며 헤르몬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미살 산은 ‘작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정확히 어떤 지역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 곳이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지역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기자는 한 때 절기를 따라 즐겁게 찬양하며 예루살렘 성전에 갈 수 있었지만 현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예루살렘을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주를 기억하며 주의 성전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주께 예배할 수도 없는 상황은 더 시편기자를 답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을 찾아온 고난을 폭포와 파도물결 같다고 고백합니다. 7절입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폭포, 깊은 바다, 파도, 물결’ 이 단어들은 인간 스스로 이겨내거나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큰 고난들은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성난 파도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 고난의 파도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와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8-10절입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비록 그는 고난의 파도와 원수들의 압제와 비방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 안에 원통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며 찬양과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은 고난의 밤, 고난의 파도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이미 찾아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가정에 이런 고난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부부관계에 어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도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을 주고 고통을 줍니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엉킨 실타래 같은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의 가정들을 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희 가정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방할 것만 같습니다. 한때 행복했던 시절,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이 맺힐 때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그날이 올 수 있을까 낙심되고 불안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가정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을 내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서 이용하지 말고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리십시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마치 귀신들려 희망 없어 보이는 아이를 고쳐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타나 도우심으로 가능성 없어 보이는 우리의 가정과 관계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은 믿음 없고 패역한 세대에 믿음과 순종의 본이 되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아직도 마음이 낙심되고 두려우십니까? 11절 말씀을 기억 하십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주님과 깊은 교제의 자리로 불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을 따라 걷다보면 때로는 고난의 밤과 고통의 파도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가 많고 우리의 고난을 보며 원수들이 우리와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조롱할 때가 있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우리의 중심을 붙드사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특히 우리의 가정들을 돌봐주셔서 가정에 찾아온 많은 어려움들을 기도로 주님 앞에 맡길 때 나타나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에 고난을 만난 시편기자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찾고 묵상하여 봅시다.

2. 최근에 내 삶에서 나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던 어려움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이며 그때 어떤 감정이 들었습니까?

3. 시편 기자가 낙심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묵상하여 봅시다.

4. 시편 기자가 사람들이 고난을 만난 자신을 조롱할 때 어떻게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묵상하여 봅시다.

(작성: 강요섭)

시편 42편(제2권) 본문 및 주석 정리,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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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제2권), 개역개정성경 본문 및 주석

시편 42편 개요

학자들은 시편 42편과 43편, 그리고 시편 9편과 10편이 각각 한 편의 시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긴 시를 예배에 사용하기 위하여 두 부분으로 나누었을 것입니다. 독립적인 시로서, 시편 42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한탄입니다. 비록 지금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으로 시를 끝맺습니다.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교훈시인데, 고라는 과거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의 동료들에게 심판을 내리셨지만, 고라의 가족은 수백 년 동안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음악의 최고 지도자들로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시편 42편의 구조

1-4절,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다

5-11절,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라는 시인의 두려움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1 [고라 자손의 마스길(교훈),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1-4절 : ” 갈급하다 “는 동사가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갈증을 표현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시인은 자신이 신앙 공동체와의 단절되었던 경험을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한 곳에서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었는데, 바로 예루살렘의 성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예배하며 어울립니다. 시인은 과거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른 백성들과 예배하며 즐거웠던 경험을 추억하며, 다시 하나님만을 경배할 그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편들에서 예배에 대한 중요한 개념은 “공동체가 함께 예배한다”라는 사실에 있습니다(행 2:40-17, 히 13:15-16과 비교하라).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절, 왜 낙심하는가 : 이 구절은 11절과 43장 5절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미래의 어느 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소망은 결코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시편에 자주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시인은 일반적인 자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찬양을 의미합니다. 이 찬양은 온 백성들 가운데 되풀이 되어야만 하는 말씀과 노래입니다(22:22, 엡 5:19, 히 13:15).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6절 : 요단 땅과 헤르몬 산의 꼭대기는,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에게 있어서 회복될 약속의 땅을 상징합니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9-11절,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 시편 42편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반석이시며 보호자이시고 인생의 기초이심을 기억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자신을 잊으셨습니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NKJV STUDY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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